시은이의 춘향가
“전 124동이에요. 저기 끝이요.”
“그렇구나.”
“오빠, 어서 들어가세요. 몸 아프다면서요. 집에 약은 있어요?”
“괜찮아. 자고 나니까 한결 좋아졌어.”
두 사람 다 똑같이 아파트 현관 앞에서 머리를 긁적였다. 대화가 끊기자 조금 어색했다. 휘나가 아파트단지 내 공원 벤치에 앉아 얘기하자고 하려는 그 때다. 복순이가 휘나의 어깨너머로 무엇을 보더니 깜짝 놀라 소리치며 말했다.
“난 몰라. 엄마다. 오빠, 다음에 봐요! 제가 연락할게요.”
“?”
휘나가 뒤돌아보니, 중동국가 귀부인 스타일의 아줌마가 시장바구니를 들고 오고 있었다. 저분이 엄마구나, 휘나는 순진한 마음에 인사라도 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들키면 죽는다는 식으로 부리나케 몸을 숨기며 도망치는 복순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확 바뀌었다. 귀부인이 휘나를 보더니, 뭘 봐? 하는 표정으로 지나쳐간다.
다음 날, 새벽조깅을 다녀온 휘나는 우편함에서 하얀 편지봉투를 발견했다.
<휘나오빠에게>
겉에 써진 글씨를 보고 복순이가 보내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생긴 것처럼 글씨도 시원시원하다. 봉투 안에 Ai 핫배지가 만져졌다. 휘나는 즉시 봉투를 뜯고 뒤집어 세웠다. 손바닥으로 핫배지가 떨어졌다. 동그란 룬 안에 삼각형 두 개가 꼭지 점 여섯 개를 이루고 있는 마법진 모양의 Ai 핫배지. 반가움에 얼굴이 활짝 폈다. 봉투 안에는 편지가 있었다.
<오빠, 보세요. 그동안 제가 소중히 보관했던 오빠의 배지를 돌려드립니다. 난간에 매달려 있던 사람이 오빠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답니다.
두 번째로 교문 앞에서 핫배지가 울렸을 때 전 너무 놀랐답니다. 쓰러져있는 오빠의 모습은 더 충격이었고요.
오빠, 인연이란 참 묘한 것 같아요.
혹시 아실지 모르겠지만 전 민희랑 어렸을 때부터 제일 친한 친구였고 지금은 또 짝꿍이에요. 그래서 오빠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지, 무슨 괴로움이 있는지, 무슨 슬픔을 당했는지 조금은 아는 부분도 있고……. 사실 전부 다 알고 싶지만 그냥 덮어두고 싶어요.
오빠, 저 역시 하늘의 뜻과 인연이란 말을 믿어요.
하지만 지금 제 손에 올려 져 있는 이 핫배지는 믿지 않아요. 잠시, 하루가 될지, 몇 년이 될지 모르겠지만 잠시 핫배지의 인연을 잊고 싶어요.
우리가 정말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면, 오빠와 나의 심장이 빨간 색 실로 묶여 있다면, 언젠가 우린 다시 만나게 되겠죠.
그래서 오빠와 저의 인연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요.
오빠, 항상 건강하세요.
복순이 올림.>
편지를 다 읽은 휘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작별 아닌 작별을 고하고 있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어떻게 찾았고, 어떻게 만났는데, 단 하루만에 작별이라니! 더군다나 민희랑 죽마고우에다가 지금 짝꿍이었어? 세상 참으로 좁구나!
휘나는 힘이 쭉 빠졌다.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집에 들어가 샤워하며 복순이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틀린 말이 아니다. 핫배지는 핫배지일 뿐이라던 시은의 말도 생각났다.
그래, 우리가 정말 인연이라면, 빨간 색 실로 서로의 심장이 묶여 있다면, 핫배지 없이도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이미 우리의 인연은 시작된 거야. 하늘의 뜻일 테니까!
휘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핫배지가 바뀌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옷을 갈아입는 거울 속의 휘나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택시 안에서 복순이를 옆에 두고 시은이의 이름을 정확하게 백육십칠 번 부른 사실 또한 전혀 모른 채로.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새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교실에서 시은을 처음 만난 휘나는 너무도 반가워 가슴이 다 설레었다. 그러나 시은은 휘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난 너의 아바타야!
휘나는 시은을 향해 가끔씩 눈길을 보냈지만 시은은 그 눈길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마치, 시간이 되돌려져 서로 잘 알지 못했던 학기 초로 되돌아 가버린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학기 초 와는 달리 스타일이 너무도 많이 바뀌어 눈에 자꾸 박혔다. 머리도 길게 풀어 어깨를 넘었고, 어깨가 훤히 파인 그 야한 옷은 뭐냐! 그리고 이어폰도 착용하지 않고 있다. 시은은 노트에 무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휘나가 지나가며 살짝 엿보니 거북이는 거북인데, 대머리 노인 같기도 했다.
짝꿍이 바뀐 인성 역시 전혀 아는 체하지 않았다. 인성이 아는 체하지 않으니 무척이나 편했지만 시은이 아는 척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불편했다.
살 빠진 것을 보고 놀랄 텐데, 쳐다보지도 않으니 휘나는 무척 서운했다.
수업이 끝나고 야자가 시작되었다.
휘나는 별 생각을 다 해보았다. 쪽지를 보내볼까? 문자를 날려볼까? 방학동안 핸드폰을 새로 사(번호는 그대로) 문자를 날려보았지만 시은은 깜깜 무소식이었다.
한숨만 푹푹,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학원에 갈 아이들은 학원에 가고 운동부 애들은 운동가고, 과외 있는 애들은 과외 하러 가고, 교실에는 몇 명 남지 않았다.
시은이 가방을 챙기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검은 색 나시와 짧은치마가 유난히 눈부셨다. 너 그렇게 짧은치마 입어도 되는 거냐! 휘나의 눈이 저절로 돌아갔다.
어딜 가는 걸까? 뒤 따라 가도 될까? 한참을 망설이던 휘나는 벌떡 일어나 부랴부랴 가방을 챙기고 시은의 뒤를 따랐다.
시은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까지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교문을 나가면 대기하고 있을 공포의 검정색 고급승용차! 휘나는 발을 빨리 해 시은이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이순신장군 옆을 지나쳤다.
미쳤어? 라며 시은이가 처음 말을 걸어오던 기억이 떠올랐다.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았건만 무척 오래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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