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핫배지 #24

매력 덩어리

by 임경주

아니나 다를까, 시은이 휘나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똑바로 선다. 한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더니 굵은 남자 목소리로,

“이 예 춘향아! 오늘밤이 가면.”

하고는 뚝 멈춘다. 휘나가 넋을 잃고 멍하게 바라보니,

“내일 밤이 또 오지요.”

라며 간지러운 여자 목소리로 타령을 시작한다. 굉장하다! 보통 실력이 아니다. 목소리가 쩍 갈라지며 돌변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야릇한 미소까지. 판소리 영화에 출연해 화제가 되었던 여배우 보다 훨씬 더 잘하잖아!

직원도 깜짝 놀라 업무를 처리하다 말고, 시은을 바라본다.

“일 년이면 몇 밤이지?”

휘나가 눈을 깜박거리고만 있으니,

“삼백 예순 다섯 밤이지요.”

라며 또 간지럽게 창을 잇는다.

이날, 역사는 이루어지고 말았다. 휘나는 시은이가 가진 매력에 쏙 빠져버렸다. 아니, 풍덩 빠져버렸다.

사랑의 시작이었다.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었다.

엄마를 잃고, 비정상적으로 변해버린 외모에, 친구들에게 상처받고 무너졌던 쓰라린 가슴, 그 가슴이 사랑으로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선택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았던 아빠의 무기력한 세계가 파괴되고, 시은의 세계로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절대로 헤어날 수 없으리라.

“여기서부터는 내가 고쳐서 중간에 섞어보았어. 잘 들어.”

“응!”

무척 기대된다는 휘나의 표정. 순진한 그 표정이 어린아이 같다.

“이 얘, 춘향아. 삼백 예순 다섯 밤을 매일 보고 놀 수 있다면 우리 무얼하고 놀면 좋겄느냐?”

시은이 휘나에게 대답해보라는 식으로 타령한다. 휘나가 우물쭈물하자 다시 춘향이 목소리로 바뀌어,

“첫 번째로 눈동자를 마주허고, 두 번째로 사랑헌다는 말만 주고받고, 세 번째로 기대어 얼굴만 만지고, 네 번째로 입 맞추다가, 다섯 번째로는 품에서 오래도록 잠들고 싶지요.”

맞아, 맞아. 나도 그래. 휘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머리가 쭈뼛 서는 것만 같았다.

“아, 그럼 언제 업고 논단 말이냐. 얘, 춘향아. 우리 먼저 업고 노자.”

시은이 휘나를 향해 업히라는 듯이 등을 돌린다. 휘나가 멍하게 있으니 다시 몸을 세워,

“아이고 도련님은 험한 소리도 다 허시요, 업고 놀다가 미끄러운 장판방에서 넘어지면 어쩔 라고 그러시오.”

라며 새 침을 뚝 떼는 표정연기가 압권이다.

휘나의 눈이 풀려있다.

“어허, 얘, 춘향아. 한번만 업어보자.”

애원하는 듯한 표정연기. 휘나의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한다.

“아이고, 부끄러워서 어찌 업고 논단 말이요? 건넌방 어머니가 알면 어떻게 허실라고 그러시오?”

엉덩이를 흔들며 교태를 부리기까지! 으아! 시은아, 너 정말 내가 아는 시은이 맞아? 나 지금 미칠 것 같아. 휘나는 가슴이 벌렁벌렁, 진정되지 않는다.

“너의 어머니는 소시 때 이보다 훨씬 더 했다고 허드라. 잔말 말고 업고 놀자“

라고 잠시 운을 떼더니, 휘나를 향해 살인미소를 또 한 방 날린다.

넉 다운!

휘나의 눈이 완전히 풀려버렸다. 두 눈뜨고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표정이다.

“도련님이 춘향을 업고 노는듸!”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어허 둥둥 내 사랑이지.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저리 보아도 내 사랑.


휘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날 위해서, 이런 바보 같은 날 위해서 시은이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니. 내 인생에 이런 황홀한 순간이 올 줄이야! 그것도 아무나 못하는 판소리를. 꿈이라면 절대로 깨지 마라. 제발, 제발 깨지 마라. 순간이여, 영원 하라!

창이 다 끝나자, 휘나는 손바닥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박수를 힘껏 쳐댄다. 시은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수줍게 웃는다. 직원도 힘차게 박수를 쳐주었다. 요즘 애들이란 호호! 하는 표정으로 직접 음료수를 뽑아와 따주기까지.

그렇게 정보입력은 계속 되었다.

“가장 감동 깊게 읽은 책.”

“세대를 잇는 교량, 엄마라는 위대한 이름.”

“세대를 잇는 뭐? 그런 책도 있어?”

“응, 육아서야. 세대를 잇는 교량, 엄마라는 위대한 이름. 내적불행에 관한 얘긴데 정말 충격 먹었고, 감동도 많이 받았어.”

“내적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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