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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동댁 Jan 04. 2022

길고 긴 터널의 끝


 

 임신 결과를 듣는 날이 왔다. 안심할 만한 수치이긴 하나 초기치고는 너무 높아서 쌍둥이일 것 같으니 조금 더 확인해 보자고 하셨다. 이 결과는 남편과 나만 알고 있기로 했다. 4번의 유산 경험으로 얻은 지혜보다는 팁이었다. 내 몸과 마음 추스르기도 힘든데 남이 보는 내 모습까지 신경 쓰는 일 따위는 또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예상대로 쌍둥이가 맞았는데 상황이 좋진 않았다. 아기집 1개는 자궁 내 안전하게 착상했는데, 나머지가 자궁 각에 어렵게 붙어있어서 수술이 불가피하단다. 주치의는 내게 수술에 관한 3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하나는 개복수술을 해서 눈에 보이는 아기집을 안전하게 제거하는 법, 두 번째는 복강경으로도 가능하나 개복보다는 확실하지는 않다. 마지막으로는 깨끗하게 소파수술을 시행해 다음 아기를 기다려 보자고.  


 논문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임신 중 개복하여 자궁수술을 하는 경우는 사례연구 말고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예 소파수술을 하자고 하신 건 의사도 그만큼의 확신이 없었던 거였다. 밤이 되면 불안한 마음은 점점 커져 조그마한 폰에 의지해 맘 카페를 뒤지고 뒤져 나와 비슷한 사례를 찾으려 무거운 얼굴로 헤매곤 했다.  


 착잡했다. 왜 또 이런 일이 생겼을까. 내 팔자에 아이란 없는 걸까. 4번의 유산을 거치는 동안 2번의 시험관 시술과 10여 번의 수면마취를 해야 했다. 추웠지만 수술대에 결박되어 몸을 끌어안을 수도 없었던 내게 주어진 건 두 팔 대신 무겁고 차가운 흰 시트만이 최소한의 체온을 유지시켜 줄 뿐이었다.


 임신에 실패하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건 따로 있었다. 결과를 듣는 날도 수술대에 오르는 날도 희망이 느껴지지 않는 때도 아닌,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 순간이었다. 시험관 시술을 준비할 때는 난자 채취와 이식으로 인해 잦고 긴 휴가를 불시에 내야 했었다. 동료들은 본인들은 원하지도 않는, 내가 부모님께도 알리지 못한 비밀을 공유한 대가로 내게서 배려를 강탈당했다. 일이 있어 진작부터 냈던 휴가도 내게 양보해야 했다.  


 그렇게 남의 휴가까지 빼앗았으면 결과라도 좋아야 할 텐데, 곧이어 유산 소식을 알려야 했고, 유산휴가까지 다녀왔으면서 말하기 힘든 얘기라는 핑계로 덕분에 잘 쉬고 왔다는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삶이 매일 흔들리는 듯했던 그 때의 나는 조금의 부끄러움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진료대에 홀로 누워 순서를 기다리며 깜깜한 초음파 화면에 영어로 적힌 장비명과 병원명, 그리고 내 이름을 가만 읽어본다. 웅웅거리는 장비소리를 듣고 커튼에 매달려 있는 묵직한 먼지, 천장 에어컨 날개가 움직이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며 눈물을 삼켰던 기억들이 지나간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번만은 눈물이 나진 않았다. 선택이란 없었고, 그저 남은 아이라도 꼭 지켜내야겠다는 결정 아닌 결심뿐이었다.


 그렇게 개복수술을 받게 되었고 그 선택으로 인해 치러내야 할 것들이 있었다. 한 달간 입원생활을 해야 했고, 외출은 30분 이내만 가능했는데 그건 달이 찰수록 늘어나는 자궁으로 수술부위 파열이 우려되기 때문이었다. 여행도 절대 불가, 무조건 병원으로 한 시간 내 올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자연스레 기한 없는 휴직이 시작됐다.


 매일을 누워 지내야 하는 삶이 지속됐다. 길고 긴 터널이라도 끝이 있다고 임신 중 더 이상의 이벤트는 생기지 않았다. 아기에게 자궁이란 세상 안전한 우주인데,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보호받지 못함에도 아기는 잘 커갔다. 집안에만 있던 나와 그런 내 속에 있는 아기는 서로에게 울타리가 되어 내가 아이를 품었듯 아이도 내 지난했던 시간들을 품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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