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줌 수업을 통해 에니어그램 워크숍을 한 적이 있었는데, 헷갈릴 것도 없이 빼박 5번이 나왔다. 걱정을 달고 사는 유형인 건 알고 있었는데, 내가 그렸던 한 가지 그림을 보고 상담자는 바로 파악을 한 것 같았다. 원가족과 현가족을 그림으로 표현해서 발표하는 거였는데 그림 그리는 걸 워낙 못하는 터라 피하고 싶었다. 안 한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하는 사람도 없는데 스트레스받아가면서까지 해야 하는 걸까? 게다가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애도 아니고 내가 먼저 하겠다고 해놓고 그림 그리는 게 싫다고 안 하겠다는 마음이 들다니,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었다.
그래 어차피 하기로 한 거 못 그리는 그림이지만, 그냥 직관적으로 그려보기로 했다. 꿈보다 해몽이라 하지 않았나. 대략 처음 들었던 생각을 가지고 간단하게 그림을 그린 후 대신 내가 설명만 잘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원가족은 결혼 전 가족을 말하는데 다섯 식구라 손가락을 그린 후 아픈 손가락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신장이 망가져 투병하다 돌아가신 아빠와 아빠 간병이 끝나고 애달픈 마음 달래기도 전에 시어머니 간병까지 하시며 맘고생하시던 엄마에게 찾아온 우울증, 당뇨 초입단계인 큰언니, 미혼인 둘째 언니에게 찾아온 유방암, 나는 발표 며칠 전에 대상포진까지 걸린 터였다. 게다가 가족들은 다 지방에 살고, 나만 서울에 살고 있다. 아빠가 돌아가시던 날은 연휴 시작 날이어서 서둘러 내려갔지만 6시간이나 걸렸기에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지만 가족들과 연락이 닿지 않게라도 되면 덜컥 겁부터 난다. 이런 일들이 더해져 걱정을 달고 살게 된 것 같다.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절대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스스로 자신을 오픈하는 만큼 나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옷으로 몸을 꽁꽁 여미고 동굴로 들어가 밖으로 얼굴만 빼끔 내밀고서는 절대 나를 도울 수 없다는 말이었다. 결국 눈물, 콧물을 훔쳐가며 이 얘기를 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이처럼 울었다. 이런 일들이 오프상에서 이뤄졌다면 손으로 어깨를 만져줌은 물론 말로 달래주지 않아도 공간, 분위기, 숨소리, 탄식, 무게감을 통해 위로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줌 수업이 아닌가. 나는 조그마한 태블릿 pc에 뻘게져 훌쩍거리는 얼굴을 들이대고 꺽꺽거렸고, 20명이 넘는 타인은 조그마한 네모 모양 속에 다닥다닥 얼굴을 묻고는 나에게 위로를 건넨다. 그렇게 믿고 싶다. 나는 그것마저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상담자와 나만이 마이크를 켤 수 있기에 다른 사람들은 숨 조리조차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코로나 때문에 줌 수업이라도 시간을 내어서 참여하는 걸 알고 있어서일까, 남의 시간을 뺏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진 않았다. 하지만 상담자는 이렇게 우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했다. 억눌렀던 마음들은 언젠가 불씨처럼 살아난다고, 치유 과정이라고 했다. 어쨌든 이 시간들을 통해서 자신을 이해하는 부분이 조금 생기긴 했다. 자신감 없이 불안한 마음은 감출수록 더 커져갔고, 문제 해결에 있어 실패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에 아이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알려주려 애썼다. 오은영 박사가 이런 말을 했었다. 육아의 최종 목표는 아이의 독립이라고. 아이의 독립을 위해 자조능력을 키워주고, 실패하고 넘어지더라도 바라보며 용인하는 것. 내가 그 부분을 생각하지 못했구나 그걸 깨달은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안 그래도 조금 느린 아이인데, 그래서 더더욱 혼자 해결해 나갈 수 있는 힘이 필요한데 내가 끼고돌았구나. 그 시간들을 생각하면 내 발을 찍고 싶으리만큼 속이 상한데, 그게 내가 가진 기질 때문이라니.. 평균대에서, 놀이터에서, 그물망을 지나는 조합놀이대에서 나는 손을 조금씩 놓아주기로 한다. 아이는 조금 겁이 나겠지만, 아니 실은 아이보다 겁나는 쪽은 언제나 내 쪽이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육아가 힘든 것은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아이마다 다르기에 답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도 고민하고 또 생각한다. 답이 없는 상황에서도 아이에게 가장 좋은 길이 어떤 건지 생각하는 것. 그게 내가 할 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