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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Aug 26. 2015

사랑 1

안고 싶어 질 때가 있어

누구에게나 특별히 마음을 움직이는 노래는 있게 마련이다. 입으로 따라 부르기에 쉬운 노래는 흔하게 흩어지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노래는 불릴 때마다 의미를 만들며 와 닿는다. 이렇게 와 닿은 의미가 마음속에서는 원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움직이게 하는 것이 노래의 멜로디 건, 가사 건, 목소리 건, 악기 소리건 어떤 이에게는 하나 의미도 없는 것들이 또 누군가에게는 들을 때마다 마음에서 의미를 퍼트리는 것이다. 못내 시려서 볼이 따가워지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노래가 있다.

  


 

그는 굉장히 진지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진지하다고 해서 같이 있기만 해도 지루하고 따분할 것 같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농담도 잘했고 장난도 잘 쳤을뿐더러 밝고 유쾌하고 친절해서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그 특유의 진지한 분위기는 단정하고 수수한 외모만큼이나 곧고 건강한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그는 밝은 성격이었지만 대책 없이 가벼이 굴지 않았고 정직하고 총명한 그야말로 보석처럼 빛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그와 말 한마디 나눠보지 못한 어색한 사이였다. 겨우 이름, 19살, 눈 옆에 작은 점, 이과생, 수학을 잘하고, 학원을 오래 다녔고, 가깝게 지내는 친구는 재수생 오빠, 알고 있는 다였다. 나는 제멋대로 느낀 그의 눈동자가 진짜일지 나의 착각일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호기심이 생겼다. 점점 더 많은 것이 알고 싶어 졌다. 19살의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의 얼굴 생김새, 또는 옷차림이 아니라 말없이도 믿음을 주는 눈빛을,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게 슬그머니 그의 네모난 어깨와 헤진 가방끈을 눈으로 좇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마음이 스며들듯이 자리 잡고서도 나는 끝내 그와 제대로 된 대화 한번 할 수가 없었다. 고3 입시학원을 휘감고 있는 암묵적인 원내 연애 금지의 분위기와 더불어 남자와 여자 간에 친하게 지내는 것조차 경계하시는 선생님들의 눈이 무서워서였다. 하지만 정말은 말 한마디에도 서투른 내 마음이 들킬까 겁이 났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나와 그는 수능이 끝나고 보름 후에 사귀게 되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 역시도 나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얼마 남지 않은 수능을 앞두고 서로 해야 할 일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망설여졌다고 했다. 그렇게 수능은 그와 나 우리 둘에게 아주 느리고 더디게 애틋한 마음을 키워갈 수 있게 해줬다. 협소하고 열악한 곳에서 자라나던 애틋함은 자유라는 풍요롭고 따스한 대지위에서 애정이라는 꽃망울을 툭 툭 맺어 내는 법이다. 대학 견학을 핑계로 내가 신청한 첫 데이트에서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고백으로 길고 긴 나의 짝사랑과 그의 짝사랑은 결실을 맺었다.   



좋은 때였다.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낸 뒤였고 수능이 끝난 뒤의 해방감과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감에 들떠있었다. 시간은 충분했다. 공부보다 재밌는 것이 이 세상에는 훨씬 더 많았고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함께 하고 함께 웃어가면서 서로를 알아갔다. 그리고 그를 알면 알수록 내가 봤던 눈빛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아니 그는 내 생각보다도 더 좋은 사람이었다. 우리 부모님의 결혼기념일, 외할머니 생신까지 챙길 만큼 꼼꼼하고 다정다감하며 어른스러웠고, 가끔 이유 없이 연락두절돼버리는 나를 이해하고 기다려 주었다. 미안함에 어쩔 줄 모르는 나에게 오히려 괜찮다며 미안해하지 말라며 다독일 만큼 자상하고 착했다. 참 좋았다. 일 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나는 그를 정말로 좋아했지만 때로는 머리를 써가며 만났다. 마음을 주었지만 머리로 밀쳐낸 적도 많았다. 나는 그에게 바라는 것이 많았지만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나는 항상 그에게 잘못한 일이 많았지만 그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곁에 있어줬다. 나는 네가 참 좋았다.   


사귄 지 여섯 달쯤 되었을까. 그때 난 지구는 무너져도 헤어짐은 오지 않을 줄만 알았다. 만약이라는 말도 붙이기 껄끄러울 만큼 우리가 헤어질 일은 없었다.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라도 헤어지게 되는 날에는 헤어진 그 날부터 우리가 사귄 시간의 곱절 그리고 또 그것의 곱절만큼이나 그를 잊지 못하고 아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다짐했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고 일 년이 지났을 때는 우리가 어떤 피치 못할 상황에 의해서 헤어질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헤어짐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차갑고 건조했기 때문에 함 부로라도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헤어지기 이주 전쯤에는 성큼 다가온 헤어짐을 멍하니 보면서 뱃속에 미지근하고 물렁거리는 것이 펄떡펄떡 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헤어지던 날 그가 나를 보면서 그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라고 말하던 그날에 그렇게 사랑했던 우리는 그 방안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해가 일찍이 자취를 감춘 캄캄한 골목 안에서 잠들어있던 여린 길 위로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것들이 내리고 춥고 내리고 춥고 내리다가 새카맣고 두서없는 발자국에 그것들이 밟히고 뭉개어져 또다시 얼리워진 얼음 위에 또 그것들이 내려앉아 다시 얼어붙어 땅에 쩍 하고 붙어서 딱딱하고 미끄러워진 것들이 문밖에 그득했는데 


방은 너무 따뜻했다.


 문닫힌 방안에 눈을 마주치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나는 다리를 오므리고 앉았다. 두 팔로 무릎을 감쌌다. 고개를 묻고 말았다. 늘 살갑게 맞아주신 어머님이 또 놀러 오라고 하셨다. 그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급하게 옷가지를 챙기며 날 따라 나왔다. 안 그래도 된다는 말도 하기 전에 문을 나섰다. 가는 길 몇 가지 의미 없는 물음이 있었다. 버스정류장에서는 몇 가지 더 의미 없는 말이 오갔다. 버스에 타기 전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 의미 없는 인사를 나누고 나는 버스에 탔다.   


텁텁한 입을 막고 소리 없이 울다가, 버스가 이대로 사라져도 모를 만큼 정신없이 울다가, 걸으면서 울다가, 그렇게 집에 돌아와 현관 앞에 앉아서 또 마저 울고 난 뒤에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련이 아주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것보단 미처 하지 못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의 앞에서는 눈물 한 방울 없이 쿨하게 인정하고 돌아섰던 것이 후회되어 뒤늦게 붙잡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노래, 가을 방학의 '가끔 네가 미치도록 안고 싶어 질 때가 있어'를 들을 때마다 내가 그를 떠올렸단 걸 말해주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노래가 나에게 너 곧 그 자체인 것처럼 와 닿고 말 것임을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나 이기적인 사실은 그가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를 떠올리길 바랬다는 것이다. 잊히는 게 반가운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에게만은 더욱더 쉬이 잊힐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그에게 나는 다 잊히고 난 뒤에라도 어딘가에서 마주친 이 노래가 가슴에 내려앉길 바랬다.   


나에게 그래서 가을방학의 노래는 너무나 특별하다. 노래를 들으면 가사도 들리고 멜로디도 들리고 뒤이어 울음 섞인 내 목소리가 들리다가 헤어지는 순간에도 여전히 진지해 밉기까지 하던 그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그래서 이별이 아닐 거라는 일말의 부정도 할 수 없게 만들던 내가 늘 사랑했던 그의 눈동자가. 하지만 미운 것도 잠시 헤어진 순간부터 지금까지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커진다. 그가 내게 주었던 모든 것들이. 이제와 생각하면 마지막 헤어짐의 무게까지도 그가 짊어지려고 했던 것 같아 그조차 고마울 뿐이다. 아무렇지 않게 뒤돌아서서 늦게야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사실을 그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말하듯이 노래를 나지막이 불러보았다. 아직도 좋은 그러나 먼 친구로 남아있는 그를 나는 가끔 안고 싶어 질 때가 있다. 


넌 날 아프게 하는 사람이 아냐
수없이 많은 나날들 속을
반짝이고 있어 항상 고마웠어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얘기겠지만
그렇지만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 질 때가 있어
너 같은 사람은 너밖에 없었어
마음 둘 곳이라곤 없는 이 세상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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