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녀의 데이트들의 집합
언제부터인가 나는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 겨울에 그와 만나서 사랑에 빠지기 까지를 되돌아보면 특히 더 그랬다.
내가 나의 연애에 대해 전과 후에 이중적인 잣대로 판단하기를 좋아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사랑에 빠지던 나와
사랑을 헤아리던 나와
사랑을 심판하는 나는
서로가 서로를 전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서 서로를 깎아내리곤 했다.
사랑에 빠지던 나는 너무 성급했다고
사랑을 헤아리던 나는 너무 성실했다고
사랑을 심판하는 나는 그래,
나는 조금도 성숙하지 못했다고.
나와- 나와- 나의- 갈등을 해결하기 이전에 진짜 해결해야 할 문제는 겨울부터 시작한 '두 남녀의 데이트들의 집합'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느냐 없느냐부터 시작한다. 그러면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대답할 수가 없어진다. 그니까 매번 모든 데이트들의 집합을 떠올림과 동시에 사랑의 정의를 내려야 하는 문제부터 시작한다면 문제가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버리기 때문에 그냥 일단은 그 사람과 나의 '상황'을 '사랑'이라고 표현해봐야 한다. 정확하자면 '두 남녀의 데이트들의 집합'을 일종의 방정식처럼 '사랑'이라고 명명해야 한다.
그러면 이제 나는 그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 다시 떠올리고 만다.
두 남녀의 데이트들의 집합 = 사랑
어떤 여자가 살을 에이는 바람이 불어 치는 날씨에 아주 얇은 드레스를 입고 눈이 쌓여 딱딱히 굳은 길을 아주 높은 구두를 신고 걸어가서 어떤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 어떤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과 그의 장갑과 핸드폰과 지갑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그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면 그것만은 사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살이 에일 것처럼 추웠던 날씨가 그다음부터는 조금도 기억나지 않고 남자와의 간격을 사랑스럽지만 정숙한 여자인양 유지하던 그 설렘은 사랑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남자가 입었던 코트 그 남자가 계산했던 최고급 레스토랑 그 남자의 직업 그 남자의 집안 그 남자의 무언가가 없었더라면 그 순간을 진즉에 잊었을 것이라 생각하면 그것이 어떤 모습의 '사랑'이라도 '사랑'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말장난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앞서 말한 '데이트의 집합들'에게 착한 사람들이 믿고 기대하는 규범적인 형식의 '사랑'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나 역시 착했고 내 사랑은 아직 양심적이었다.
그런데 사랑이라고 하는 상황에서 양심을 운운하는 것이 어울리는 일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건 충분한 자신감이나 확신이 없다는 것인데 그래도 굳이 굳이 한 가지를 확신해야만 한다면
나는 사랑과 양심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쪽에 걸겠다.
양심적인 사랑이 있다면 필수 불가결하게도 비양심적인 사랑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많은 착오와 슬픔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천수만 년의 인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수천수만 번의 이별과 배신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사랑' 그 자체로만 존재했으면 하는 바람을 영원히 놓아버릴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양심적인 사랑 따위는 차라리 없었으면 하고 바라본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이 나의 바람과는 달리 사랑으로 시작한 것은 양심으로 끝나버렸다. 나는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하는 데이트들의 집합에게 이제 미안해졌다. 그것들의 이름을 지워버린 것은 정말은 나였다.
가만히 글을 써 내려가며 이제 나는 맨 앞을 조금 고쳐 써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랑에 빠지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에 대해 말할 것이 아니라, 사랑의 입장에서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우스운 여자인지 쓰도록 해야 할 것만 같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사람들이 사랑에 빠진다는 것을 얼마나 우습게 만드는지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