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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Jan 10. 2017

기호학으로 보면 더 흥미로운 친절한 금자씨[6]

박찬욱 - 친절한 금자씨

▶ 백선생의 사체와 증거들을 묻어 버리는 가족들, 그리고 그때까지 뒤에 물러나 있던 금자는 양해를 구하고 눈감은 백선생의 얼굴에 총구멍을 낸다. 금자는 웃는 듯 우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우리는 표정을 보고 상대방의 기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것은 각각의 표정이 가진 공시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웃음은 기쁨을 뜻하는 것, 눈물은 슬픔을 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문학이나 영상에서는 종종 웃음이 가진 기쁨이라는 공시의미가 아이러니하게도 슬픔 또는 절망이라는 공시의미로 변주하기도 한다. 흔히 너무 슬프고 충격적인 상황이 믿겨지지 않아서 허망한 웃음을 짓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이때 선택된 웃음이라는 모순적인 계열체는 슬픔이라는 통합체를 구성하는 데에 비극성과 처절함을 더해준다. 즉, 동위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동위성을 강화시켜주는 독특한 역할을 한다. 금자의 입이 웃고는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처연하고 기괴한 느낌을 주는 이유이다.



▶모든 행위가 종료된 후에 금자와 유족들은 나루세에 모여서 케이크를 나누어 먹는다. 누군가의 선창으로 생일축하노래를 부르며 잠시 애도의 시간을 가진 뒤 그들은 흩어진다.

①공동식사

같은 음식을 한데 모여 나누어 먹는 것, 즉 공동 식사의 공시적 의미를 떠올려 보면 위의 장면은 그리 단순한 케이크 커팅식이 아니다. 태초에 식사는 매우 배타적인 행위였다. 식사가 개인들의 생존본능에 의한 원초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배타적인 개인들이 한데 모여서 같은 것을 먹고 마신다는 것은 이를 통해 배타성이 제거되고 새로운 사회적인 관계가 성립했음을 알려준다. 공동의 것을 나누는 행위를 통해 거기 참가한 사람들이 고유한 연결고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종교의식에서 밀가루 빵을 예수의 몸으로 여기고 이것을 나누어 먹는 것이 바로 대표적인 공동 식사의 사례이다. 이 때 그들이 '나누어 먹는 것'이 바로 기표이고, 실제로 생성되는 기의는 바로 '밀접한 관계의 성립'이다. 따라서 나루세에서 금자를 비롯한 피해자 가족들이 원탁에 모여 케이크를 나눠먹는 행위는 그들이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가 되었음을 나타낸다. 즉, 같은 범죄를 저지르고 같은 음식을 나눠먹는 의식을 통해 그들은 평생 끊어지지 않고 서로를 연결할 죄의 고리에 대해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것이다.


②생일 축하 노래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 생일 축하 합니다.> 한국에서 생일에 의례적으로 불리는 아주 짧은 노래이다. 당연히 이것의 사회적인 공시의미는 탄생에 대한 축하와 기쁨, 환희일 것이다. 그러나 위의 장면에서 피해자 가족들은 살해당한 자신들의 아이를 떠올리면서 슬프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다. 이것은 아이의 죽음, 그리고 또 다른 죽음을 목격한 상태에서 앞에 놓인 케이크라는 기호가 내포하고 있는 기념일의 속성이 합쳐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일 축하 노래의 공시의미가 죽음에 대한 애도와 슬픔, 절망이라는 개인적 공시의미로 변한 것이다.

③계좌번호

계좌번호는 퍼스에 의하면 법칙기호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인 법칙에 의해 자의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계좌번호 그 자체는 분절될 수 없는 코드들이다. 그러나 위의 맥락에서 계좌번호는 곧 유가족들에게 분배될 돈을 뜻하는 상징기호이다. 계좌를 통해 돈이 거래됨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더 심층적인 기의를 파헤치면 이 돈은 백선생의 소유물이었던 것을 폭력적이고 강제적인 방식으로 획득한 것이다. 즉 계좌번호를 적어낸 쪽지는 그들의 죄, 그리고 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더 큰 죄를 상징한다.   



▶화장을 지우던 금자는 원모의 환영을 만난다. 원모는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다. 금자는 원모에게 용서를 빌려고 하지만, 죽지 않았다면 꼭 그만큼의 어른이 되었을 얼굴로 원모는 금자의 입을 막아 버렸다. 케이크를 만들어 집으로 향하던 금자는 맨발로 눈을 밟으며 나온 제니에게 달려가 안긴다. 두부모양의 흰 케이크를 제니에게 내밀고, 제니에게 하얗게 살자고 말한다. 금자는 끝내 케이크에 얼굴을 파묻고 만다.

①원모

금자의 환영에서 아이 원모가 어른 원모로 변한 장면이다. 물론 어른 원모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없고, 본적 도 없는 대상이지만 우리는 의상과 자세 담배라는 소품의 유사성을 통해 우리는 그 남자가 원모라는 사실을 유추해낸다. 어른 원모는 원모가 어른으로 존재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다시 한번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즉, 원모가 절대 어른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금자의 죄도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다.  



②‘구원’의 계열체적 선택

흰색의 눈, 흰옷을 입은 맨발의 어린 소녀, 흰색 두부모양의 케이크, 모두 공시의미가 순결, 속죄, 회개, 정화 등을 뜻하는 계열체들로 영혼의 구원이라는 통합체적 의미를 구성하고 있다. 

     

③언어의 정박

그러나 이렇게 여러가지 계열체들이 구원이라는 통합체적 의미를 구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자의 영혼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명확히 드러난다. 화면에 흐르는 나레이션, 언어적 메시지가 이미지들의 의미를 반대로 정박시켰기 때문이다. 결국 수용자는 여러가지 속죄의 기호들의 의미를 포기하고 언어적 메시지가 지시한대로 이해한다.    

"이금자는 어려서 큰 실수를 했고 자기목적을 위해 남의 마음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그토록 원하던 영혼의 구원을 끝내 얻지 못했다.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나는 금자씨를 좋아했다. 안녕 금자씨“



④제니의 발화적 공시

그런데 이 장면에서 주목해야하는 것은 그동안 줄곧 들려오던 나레이션의 발화적 공시가 변한다는 것이다. 이전에 나레이션의 발신자는 장면과 인물에 대해 일정한 거리감을 두는 화법을 사용하면서 일체의 정보를 드러내지 않았다. 따라서 발신자가 누구인지, 수신자는 누구인지, 메시지의 맥락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레이션의 마지막에 발신자는 자신을 '나'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나'가 금자씨를 좋아했음을 고백한다. 이 부분에서 수용자는 나레이션이 사실은 제니임을 알게 된다. 발화적 공시가 전지적 객관성에서 전지적 주관성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또 맨 마지막에는 안녕(어른목소리) -> 금자씨(제니목소리) 로 변하면서 발신자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줄곧 제니의 이야기 였으며, 먼 훗날 제니가 어른이 되었을 때 금자를 돌아보며 회상했던 것임을 마지막에야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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