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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Sep 28. 2021

걱정 말아요 그대
SHOULD I BE WORRIED?

노는(遊)신부의 틈과 사이로 본 밴쿠버의 여백이 있는 풍경(1)

밴쿠버의 그랜빌아일랜드 풍경 photo by noneunshinboo


오늘도 어제처럼 난 걷는다. 

요즘, 속 편한 사람 없고, 속 좋은 사람 없고, 속 풀 필요 없는 사람 없고, 그렇다고 빈 속으로 걷기엔 어지럽고, 해서 뭘 좀 속에 넣고 오늘도 난 속 시끄럽게 만드는 시어머니 세상 시-월(드) 길이 아닌 시끄러운 속 조금이나마 다독여주는 밴쿠버의 씨-월(Sea Wall) 길 (*) – 밴쿠버의 바다 둘레길이라 부르면 어떨까 싶다 – 을 걷는다. 

그리고, “SHOULD I BE WORRIED?”

밴쿠버 바닷가(Sea Wall)를 걸을 때면 나를 잠깐 멈추게 하는 곳들, 것들이 있다. 여기 캠비 브리지(Cambie Bridge) 아래, 짧은 한 문장도 그 중에 하나다. 언제부터 인가 그곳에 서서 걷는 나를 멈추게 하고, 때론 위로하고 안아주고, 때론 온 길을 되돌아보게 하고, 때론 지금 여기 선 나를 좀더 오래 생각하게 하는 아주 짧은 문장. 여기, 가볍고 반가운, 동시에 무겁고 불편한 짧은 한 문장이 내게 말을 건다. 묻는다. 지나치는 모르는 행인이 눈 마주치면 던지는 ‘Hi’처럼 짧게, 혹 가까운 스타벅스가 어딘지 묻듯 아무렇지 않게. 그러나 조금 느닷없다. 

“SHOUD I BE WORRIED?” 

“나?” 둘러보지만, “그래, 너!” 라는 듯 바로 나다.  

나는 지금 무엇을 걱정하고 근심하고 무엇 때문에 불안해하는가? 왜 걱정하고 근심하고 불안해하는가? 나는 지금 무엇에 붙들려 있는가? 지금 여기, 무엇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가? 나를 걱정, 근심, 불안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실체가 있는가, 나의 상상 속에 있는가? 

도대체 누가 묻는 것일까? 누구에게 묻는 것일까? 누가 답해야 하는 것일까? 묻는 것일까, 답하는 것일까? 


 

SHOULD I BE WORRIED? photo by noneunshinboo


성산포에서는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 이생진의 시 <설교하는 바다>


근심, 걱정, 불안을 무슨 술처럼 마시고, 숙취에 정신 못 차린 이들이 홀로 혹은 같이 걷고 뛰는, 개를 산책 시키는 건지 개가 사람을 산책 시키는 건지 아무튼 서로를 끌며 걷고 뛰는, 자전거는 내달리고 유모차는 느리게 걷는, 여기 밴쿠버 바닷가를 따라 난 산책길 한 켠, 남들 다 걷고 뛰는데 홀로 구석에 자리잡고 서서 물끄러미 바다를 보는 듯, 산책길 뛰고 걷는 이들을 보는 듯, 고승 처럼 선 바다목사는 세상에서 가장 짧으나 임팩트 있는 화두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하듯 오가는 이에게 던진다.     


“SHOULD I BE WORRIED?” 

오 엑스의 단답? 하지만 ‘예’ 든 ‘아니오’ 든 짧게 답하기 애매하다. 길게 해도 찝찝하고 하지 않아도 찜찜한 질문이다. 하지만 생각 없이 성의 없이 답 했다가는 뭔가 뒷맛이 남을 질문이다. 그래서, 고민거리 생각거리 주는 무척 불편한 귀찮은, 화두 같이 길게 남을 짧고 좋은 설교다. 

모든 것을 다 아는 듯, 도 통한 듯, 근엄하고 홀리스런, 높은 강단에 강단있게 선 목사가 쏟아내는, 한 치의 질문도 의심도 용납치 않는, 마치 받아쓰기라도 해야 할 듯한, 뻣뻣한 교훈과 두툼한 삶의 지침으로 가득한 설교는 분명 아니다. 예전에도 들은 듯한, 또 들으나 마나 한 듯한, 정말 설교 같은 설교 역시 아니다. 긴 설교, 반사적으로 나오는 자동입력 추임새의 ‘아멘’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장황함도 없다. 딱히 더 붙이고 말고도 없다는 듯, 툭. 그냥 지나가는 길 마주친 눈 길에 스치며 ‘Hi’ 하듯, 툭. 전단지 불쑥 ‘여기’ 하며 별거 아니라는 듯, 툭. 누군가의 발에 채인 조그마한 조약돌이 내 발에 닿은 듯, 툭. 나무 위 부주위한 다람쥐가 떨어뜨린 도토리 한 알이 내 앞에 떨어지는 듯, 툭. 

“뭐지?” 무시할 수도 있지만, 아니다. 생각없이 여유 있게 걷자고 나온 바닷가 산책길에서 만난, 길거리 데코레이션이라 하기엔 적잖이 묵직하다. 귀찮다. 불편하다. “SHOULD I BE WORRIED?” 라니, 무슨 속셈인가? 너무 불친절하게. 그럼 나도 불친절하게, “NO! . . . ?” 영 개운치 않고, “YES! . . . ?” 역시 영 마뜩잖다.


팬더믹 이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몇 년 전 어떤 야외 공연이 이 곳에 있었다. 다른 구조물들은 공연 후 모두 철수했는데 이것만은 왠지는 모르나 그 자리에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그땐 재밌네, 하며 그냥 지나쳤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다. 내 시선과 관심을 끈다. 상황에 너무 딱 들어맞는다. 그렇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답은, “YES, OF COURSE! I SHOULD BE WORRIED.” 인가? 아니다. 되묻는다. “DO YOU THINK, I SHOULD BE WORRIED?” 묻는 이에게 다시 묻는다. 너의 답을 먼저 듣고 싶다, 무어라 할지를. 네 것을 듣고 싶고, 무언가 확인을 받고 싶고, 그런 후에 내 답을 하겠다는 심보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너가 나이다. 자문자답. 




지금은 위로와 희망이 필요한 때다. 영화처럼. 딱 그렇다. 영화처럼 되어 버렸다. 막히고 갇히고 그 나마의 겨우 겨우 가다 서다 가다 서다의 반복도 이젠 다 된 듯싶은 요즘. 그나마의 여기 남은 기대도 저기 기다리는 포기와 절망으로 갈아타야 한다는 듯 말하는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나 갈아타기가 아닌 잠깐의 숨 고르기와 쉼이 주는 위로다. 그리고 뿌옇게 된 내 시선 그 너머 저 앞의 희망, 보고 듣는 것들의 틈과 사이, 여백으로 눈과 귀, 생각과 관심을 주고, 거기의 위로와 희망을 발견하는 일이다. 고단하고 빡빡한, 절망처럼 있는 현실의 울을 뛰어 넘기 위해서는 희망이, 그리고 희망이 주는 위로가 우린 지금 정말 필요하다. 절망 아닌 희망, 나와 우리 어디쯤에 있는가? 밴쿠버 바다 둘레길 위의 내가 묻고 내가 답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묻고 답한다. 


여기 길 한 켠, 걱정과 근심과 불안의 술은 마시고, 절망에 어느새 취해가는 우리, 온종일 숙취로 정신 못 차리는 우리에게 바다가 해장국처럼 건넨다. 

“SHOULD I BE WORRIED?” 

“NO! I AM NOT WORRIED.” 

쓰린 정신, 쓰린 속 차린 나에게 한 옛 성인(聖人)이 오가는 이들 사이, 바닷소리를 빌려 건네는 한마디. 

“DON’T WORRY. ALL WAS WELL, ALL IS WELL, AND ALL SHALL BE WELL.” 

밴쿠버 바다가 주는 따뜻한 백신, 걱정과 근심과 불안으로부터의 거리 두기다. 바다는 내 걱정하고, 나는 내 걱정만 하고. 설교를 바다가 하고, 나는 바다를 듣고. 여기 밴쿠버에서도 나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그리고, “GO IN PEACE.”


* 갓길의 갓글 

시-월(드) 길과 씨-월 길은 그 소리 비슷하나 장난스레 다르다. 시-월(드) 길은 시어머니들이 속 편하게 걷는 길인 반면, 씨-월 길은 그 분들의 며느리들이 속 편해질까 싶어 걷는 길이다. 그리고 이건 개인정보로서 혹 오해할까 싶어 덧붙이는데, 난 시어머니가 없다. 대신, 본인은 그런 시어머니는 결코 아니라고 –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 하시는, 그러나 어찌되었든 한 며느리의 시어머니인 것은 분명한 그 어느 한 시어머니의 장남이다. 그리고 이건 절대 내 얘기가 아니라 개인정보가 아닌데, 비록 며느리들 속 시끄럽게 만드는 시어머니들 – 그러나 그걸 속 시원히 인정하시는 시어머니는 난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 일 지라도 당신의 그 귀한 아드님들께는 결코 그러지 않는다고 하시는데, 그건 단언컨대 절대 오해다. 속 시끄러워진 그 며느리들의 그 터진 속에서 튀어나온 불똥과 파편이 과연 어디로 튈지 그 아드님들과 며느님들은 다 안다. 그 분들만 모른다. 아는 사람 다 안다. 그 분들도 한때 며느리였을 옛적 생각하신다면 다 아실 텐데. 아시는지, 몰라도 된다 모르고 싶다 하시는 겐지. 모름지기 마음의 평화, 가정의 평화는 모르는 척이 아닌 앎에서 온다. 물론, 사실을 모르는 척해야 할 때도 사실 많고, 또 그 사실을 모를 때 평화가 찾아올 때도 사실 많다. 그래서 마음의 평화, 가정의 평화는 세계 평화처럼 복잡하고 디테일해서 알 듯 말 듯, 올 듯 말 듯, 그리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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