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회사이 Oct 07. 2022

삶이 꽃자리입니다

사도행전, 그리고 교회다움 (18-2)


“가다가, 정오 때쯤에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나는 땅바닥에 엎어졌는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나에게 대답하시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이다' 하셨습니다. . . . 그래서 내가 말하였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는 곳마다 회당에서 잡아 가두고 때리고 하던 사실을 사람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증언자인 스데반이 피를 흘리고 죽임을 당할 때에, 나도 곁에 서서, 그 일에 찬동하면서, 그를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 사람들에게로 보내겠다’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2:6-8, 19-21)


1.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자기에게서 당신의 눈을 떼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깨달았습니다. 스테반이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하는 그 자리. 하나님께서는 스테반만 보셨던 것이 아니라, 그 스테반 곁에만 계셨던 것이 아니라, 거기 스테반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마땅하다 하며 증인들의 옷을 지켰던 유대 엘리트 청년 바울 옆에도 하나님은 계셨다는 것을 바울은 그때 알았습니다. 

이제 내가 나설 때가 되었다며 집집마다 찾아 들어가서 예수님을 따르는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끌어내서 감옥에 넘기고, 교회를 없애려고 날뛰었던 그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슬퍼하시며 그런 바울을 보고 계셨다는 것도 바울은 그때 알았습니다. 


“왜 너는 나를 핍박하느냐?” 


바울은 그 주님의 음성을 듣고 알았습니다. 

그리고 다마스커스로 가는 그 길 위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 예루살렘과 온 유대 땅, 나아가 그 넓고 낯선 이방 땅을 숨어 다니고 쫓겨 다니며, 때론 매도 맞고 때론 감옥에도 갇히며, 그 주님의 사도로, 복음 전도자로 길 위에서 사는 바울을 주님께서 줄곧 함께 하셨고 보셨고 아신다는 것을 또한 바울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바울, 그리고 현재의 바울, 그 어떤 것도 뺄 것이 없고, 더할 것이 없습니다. 그의 모든 삶 구석구석, 구비구비, 골목골목마다 계신 하나님을 뺄 수 없고, 더할 수 없고, 과장할 이유도 없고, 축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그 모든 바울의 삶이 다 간증입니다. 어느 한 부분, 어느 한 기간, 어느 한 시절을 과장하고, 화려하게 꾸밀 이유가 없습니다.  


이건 나의 삶 중의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은 어두운 시간이었다, ‘흑역사’였다, 이건 잊고 싶고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 굳이 말할 이유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거기 계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때의 나에겐 별 관심이 없으셨다, 내 삶에서 들어 내도 된다, 지워도 된다, 없어도 된다. 바울은 그렇게 자기의 삶을 재단하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여기서 여기 까지가 남들에게 들려 줄 간증이다,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2.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모든 것이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 ‘말씀’이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창조된 것은 그 ‘말씀’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요한복음서 1:1-5)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 빛을 우리에게 비추셨다고 말합니다.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 . .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세워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6-11, 14) 


바울은 우리가 그 빛을, 그 하늘로부터 내려 오신 보물을 우리의 안에 담는다고 말합니다. 질그릇으로 담는다고 말합니다. 하늘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생명의 강물을 흙으로 빚은 항아리로 우리는 담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쉽게 깨지는 그릇이고 항아리입니다. 사실은 벌써 깨진 질그릇이고, 구멍이 뚫린 항아리입니다. 그러니 온전히 진리의 빛을 담고 생명의 물을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질그릇인 우리가 아무리 박해를 받아도, 어떤 고난 속을 걸어도 움츠러들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걸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 빛과 물을 담는 우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빛과 물이신 하나님, 그 안으로 ‘풍덩’하고 우리가 뛰어들기 때문입니다. 그 빛과 물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실 내가 깨진 질그릇이 되었다 해서 쏟아지는 물이 아니십니다. 깨지고 찢기고 구멍이 숭숭 나서 형편이 엉망인 나, 한 번이라도 제대로 그릇이기는 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산산조각이 난 나, 쏟아질 물도 없이 담은 것은 먼지 뿐인 나, 그러니 주님은 사실 내 안에 담길 수 있는 그런 물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그냥 나의 있는 상태로 내가 그 안에 ‘풍덩’ 빠져 담겨져야 할 강물이십니다. 내가 그 안에 있어야 합니다. 


3.        

우리의 삶은 끊어진 부분으로 있지 않습니다. 전체로 있습니다. 하나로 있습니다. 우리는 나의 감추고 싶고 부정하고 싶은 어둔 시간이든, 맘껏 한껏 드러내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은 나의 찬란하고 화려한 ‘화양연화’의 시절이든,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있는 나입니다. 그리고 그 전체로서 하나인 나는 그리고 우리는 또한 하나님 안에 한 부분으로 있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 안에서 전체로 있습니다. 하나로 주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빠 엄마 앞에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그냥 하나인 나입니다. 


그러니 그 나인 채로 그 주님의 품 안으로 뛰어들면 됩니다. 그럴 때 깨진 곳으로, 부서진 곳을 통해 오히려 주님께서는 나의 깨지고 찢기고 부서진 그 틈, 그 사이로 들어오시어 나를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나의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구상(具常) 시인의 시, ‘꽃자리’입니다.  


꽃자리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깨진 그릇, 물이 쏟아진 거기, 그 곳으로 주님께서 밀고 들어오실 그 때, 그 깨진 자리는 꽃이 피는 자리, 꽃자리가 될 것입니다. 나의 꽃 같은 시절이 져서 너무 아픈 그 자리, 화려한 꽃이 떨어진 그 자리는 그러나 꽃자리가 될 것입니다. 열매가 맺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꽃이 떨어져 뒹구는 지금 여기 내가 앉은 그 아픈 자리에 다시 꽃이 피고, 꽃이 지고, 그래서 열매가 맺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고단한 삶, 그 우물가. 여태껏 깨진 항아리로 살던 사마리아 여인은, 지금껏 쏟아진 물로 살던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을 만납니다. 너무 싫었던 그 우물, 한 낮의 태양을 피할 천막도 그늘도 없던 거기 그 우물가는 이제 그 여인에게 주님을 만나는 꽃자리가 되었습니다. 이제까지의 어두웠던 삶은 꽃이 피는 간증의 자리가 됩니다. 


이 여인은 더 이상은 깨진 항아리로 그 쏟아진 물에 넋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생명의 강물에 풍덩 담겨 있는 나이기에 그럴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보기엔 변함 없이 여전히 깨진 항아리 같은 삶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눈에 보이는 그 쏟아진 물을 더 이상은 보지 않을 것입니다. 저기 보이지 않는 그러나 영원한 생명의 강물에 풍덩 빠져 있는 나를 보며 느끼며 믿으며 물을 담은 항아리, 강물 속에 담겨진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의 그 고달픈 삶은 간증입니다. 주님께서 계시기에 간증입니다. 

무엇을 덜고 보태고 해서 간증이 아니라, 내 눈에, 남의 눈에 무엇이 더 좋아졌고 나아졌고 해서 간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에 눈 팔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나의 삶이 간증입니다. 


4.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어 줍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16-18)


지금 여기 바울의 말이 참 간증입니다. 지금 겪는 아픔이 고난이 오히려 참 간증입니다. 지금 겪는 고난과 고통이 일시적이다 가볍다는 바울의 말은 실제로 몸과 마음에 닿는 아픔이 일시적이다 가볍다 별 것이 아니다,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내게 주실 그 크나큰 영광, 그 보이지 않는 것을 그러나 내가 이제 바라보니, 그래서 지금의 아픔과 비교하니 그렇다는 말입니다.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이 너무 크다면, 내가 받을 영광은 그 보다 더 클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남이 나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내가 나에게 하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적처럼 지금 고통이 작아지진 않습니다. 또한 폄하될 수도 없습니다. 남 얘기하듯 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고통은 고통입니다. 그래서 고통 그 자체가 간증이 아닙니다. 누구의 고통과 고난이 그저 간증거리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텨내는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텨내는 너. 그 나와 너가 간증입니다. 아프면 아프다 힘들면 힘들다 하며 서로에게 숨기지 않고, 서로에게 나는 괜찮다 나는 좋다 그렇게 척하지 않고, 아프면 아픈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함께 버텨 걷는 삶, 그리고 좋으면 좋은 대로 아프지 않으면 아프지 않은 대로 또한 함께 걷는 삶, 그것이 우리의 믿는 사람들의 삶이고 간증입니다. 


그러나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 것만 들려주는 것이 아니기에 어렵습니다. 나의 약한 것을 보여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솔직한 삶이고 진정한 간증입니다. 나의 약함, 나의 고통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것, 그러나 강하신 주님을 믿기에 나의 약함을 드러낼 때, 그 우리의 찢기고 상한 마음, 부서져 아픈 일상. 그 깨진 틈 사이가 주님의 사랑과 은혜의 물줄기가 들어오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또한 그 깨진 그 틈과 그 사이로 주님의 은혜는 또한 내 밖으로 흘러 나의 이웃의 그릇을 채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린 함께 그 은혜의 강물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이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저 먼 나중에, 나 죽거든 사는 나라가 아니라, 할 수 있는 한 지금 여기서 살아내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자유와 평화와 구원의 삶을 함께 사는 나라, 교회는 그 나라를 사는 연습을 하고 훈련을 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모인 그리스도인이 사는 삶입니다. 


깨진 삶, 깨진 그릇, 깨진 마음과 깨진 몸을 서로에게 감출 필요가 없는 곳, 오히려 바울 사도처럼 자랑할 수 있는 곳, 그리스도의 상처를 내가 안고 있다며 오히려 드러낼 수 있는 곳이 교회여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 적어도 이 주변에서는 가장 안전한 곳이 교회여야 합니다. 


나의 깨지고 찢긴 틈 사이로 주님께 받은 사랑을 서로에게 흘러가게 하는 곳, 그 깨진 틈 사이로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곳, 서로의 날 것 그대로의 삶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지는 곳, 그곳이 교회여야 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