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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Oct 06. 2022

삶이 간증입니다

사도행전, 그리고 교회다움 (18-1)


“나는 유대 사람입니다. 나는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태어나서, 이 도시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선생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의 율법의 엄격한 방식을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 여러분 모두가 그러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 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이 ‘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여 죽이기까지 하였고,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묶어서 감옥에 넣었습니다. 내 말이 사실임을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가 증언하실 것입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동포들에게 보내는 공문을 받아서, 다마스쿠스로 길을 떠났습니다. 나는 거기에 있는 신도들까지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처벌을 받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2:3-5)



William Adolphe Bouguereau, The Broken Pitcher (1891)

1.        

누구에게나 삶에서, 기억에서, 이력에서 지우고 싶고, 잊고 싶고, 그래서 없었던 일이면 좋겠다 싶은 것이 있습니다. 흑역사라고 부르는 어두운 과거입니다. 깨진 항아리이고 쏟아진 물입니다. 내 삶에, 내 기억에, 그리고 나의 이력에 남아 있어 어찌할 수 없는 과거입니다. 사실 그 과거가 있어 지금이 있습니다. 그래서 돌이킬 수 없고,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여기 우물가에 한 소녀가 있습니다. 


그 옆에 깨진 항아리가 있습니다. 지금 이 소녀는 누구를 보고 있는 것일까요? ‘항아리를 그만 깨뜨렸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는 것일까요? 아니면 ‘여기 깨진 항아리같은 나를 어떻게 좀 해달라’ 저렇게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를 지나십니다. 긴 여행길에 피로하셔서 거기 한 우물가 옆에 앉으십니다. 그때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옵니다. 그 여인에게는 예전에 남편이 다섯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한 남자와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남자도 남편은 아닙니다. 물으나마나 참 우여곡절이 많은 여인, 기구한 삶의 여인입니다. 말하자면 흑역사를 지금도 살고 있는 여인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의 처지는 깨진 항아리와 같습니다. 바닥에 쏟아진 물과 같은 처지입니다. (요한복음서 4:1-42) 


“나는 쏟아진 물처럼 기운이 빠져 버렸고 뼈마디가 모두 어그러졌습니다. 나의 마음이 촛물처럼 녹아내려, 절망에 빠졌습니다. 나의 입은 옹기처럼 말라 버렸고, 나의 혀는 입천장에 붙어 있으니, 주님께서 나를 완전히 매장되도록 내버려 두셨기 때문입니다. . . . 그러나 나의 주님, 멀리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의 힘이신 주님, 어서 빨리 나를 도와주십시오.” (시편 22:14-15, 19)


“내가 죽은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으며, 깨진 그릇과 같이 되었습니다. . . .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주님만 의지하며,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내 앞날은 주님의 손에 달렸으니, 내 원수에게서, 내 원수와 나를 박해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시편 31:12, 14-15)


어두운 과거가 현재를 쫓아다닙니다. 현재도 어둡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잊고 싶고, 지우고 싶고, 그래서 없었으면 좋을 그 과거는 현재가 되어 따라다닙니다. 깨진 항아리로, 쏟아진 물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이런 나를 하나님은 기억이나 하시는지, 나를 그냥 내버려 두시기로 하신 것인지, 멀리하시기로 작정을 하신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나의 힘이신 주님, 어서 빨리 나를 도와주십시오. 내 원수와 나를 박해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그런데, 이런 깨진 그릇과 같은 나의 삶이 간증이 될 수 있을까요? 이런 삶이 간증이 되려면 뭐가 더 필요할까요? 뭔가 더 극적인 변화, 반전이 있어야 할까요? 역전 만루 홈런이라도 있어야 할까요? 누가 들어도 감동적인 그 무엇이 더 있어야 할까요? 그래야 그 삶이, 나의 삶이 간증이 될까요? 


2.        

“괜찮아. 하나님께서는 이겨낼 수 있는 고난과 시련만 주셔. 지금 하나님께서 간증거리를 주시기 위해 그러시는 거야. . . . 지금 겪는 어려움은 나중에 다 간증거리가 될 거야. . . . 간증거리 하나 생겼네, 하나님께서 아마 나중에 크게 쓰실 모양이네. . . . 얼마나 큰 복을 주실려고 그러시나, . . . .” 


이런 말이 정말 위로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듣는 사람이 정말 그 말에 위안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건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이런 말을 들어보았다면, 이 말이 생각처럼 위로나 위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살면서 겪는 그 많은 어려움과 아픔과 고통이 언젠가의 간증을 위한 것이라면, 그건 참 씁쓸할 것입니다. 정말 지금 내가 겪는 일이 사람들이 말하는 그 간증거리라면, 그런 간증을 위해 내가 겪는 어려움이고 사는 삶이라면, 참 고약스러울 것입니다. 간증을 위한 삶, 간증거리가 되는 삶, 무엇을 증명하기 위한 삶이라면 그 삶은 참 고역일 것입니다. 


3.        

철저한 율법주의자로서 성전이 삶의 중심이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목숨을 지키는 것과 같고, 유대인이라는 것에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던 청년 바울.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나 로마 시민권자이며, 정치 종교의 중심지 예루살렘에서 그 시대의 최고의 율법학자로부터 교육을 받은 수재이고, 또한 유대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바리새파로서 유대 사회, 유대교의 리더로서의 모든 엘리트 과정을 마친 청년 바울. 유대와 예루살렘 사회에 적잖은 물의를 일으키며 이상한 가르침을 전했던 예수라는 사람을 따르고, 또한 그 이상한 가르침을 거침 없이 전하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중요한 임무를 대제사장들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수행하는 바울. 그 바울의 삶은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삶처럼 보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삶, 거룩한 삶, 완전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복음 전도자가 된 지금의 사도 바울로서는 분명 감추고 싶고 지우고 싶은 어두운 역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어두운 역사가 오히려 간증을 더욱 감동적이게 할 수 있다, 남 얘기처럼 말합니다. 그 뒤의 이야기는 그래서 그 만큼 더 극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야 한다, 그래야 간증으로서 효과는 더 클 것이다, 남 얘기로 여깁니다.  


“가다가, 정오 때쯤에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나는 땅바닥에 엎어졌는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나에게 대답하시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이다’ 하셨습니다. . . . 나는 그 빛의 광채 때문에 눈이 멀어서, 함께 가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갔습니다.” (사도행전 22:6-11)


그래서 그런지 정말 극적입니다. 무엇하나 부러울 것이 없던 나였는데, 어느 순간 고난이 찾아왔다, 방황했다, 좌절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 . . 그런데 그때 나는 주님을 만났다.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잘 살고 있다, 성공한 삶,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부러울 것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Happy Ever After . . . 바울의 삶도 이런 패턴으로 가는 것일까요? 그래야 흔히 시람들이 듣길 원하는 그런 간증이 될까요?   


photo by noneunshinboo 


4.        

“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 사람들에게로 보내겠다.”


주님의 명령을 붙들고 사도로서의 길, 복음 전도자로서의 길을 가는 바울. 변화된 바울, 새 삶을 사는 바울. 그래서 우리는 승승장구하는 바울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바울의 삶을 잘 압니다. 전혀 그렇지 않은 바울의 삶입니다. 바울 자신이 직접 말하는 회심 후의 삶,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그리고 복음 전도자로서의 삶은 이렇습니다.  


“. . . 나도 감히 자랑해 보겠습니다. 내가 어리석은 말을 해 보겠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히브리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내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말합니다마는,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1:21-23)


여기까지는 괜찮아 보입니다. 

“유대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vv. 24-27)


참 파란만장합니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닙니다.  

“그 밖의 것은 제쳐놓고서라도,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넘어지면, 나도 애타지 않겠습니까? 꼭 자랑을 해야 한다고 하면, 나는 내 약점들을 자랑하겠습니다. 영원히 찬양을 받으실 주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님을 아십니다. 다마스쿠스에서는 아레다 왕의 총리가 나를 잡으려고 다마스쿠스 성을 지키고 있었으나, 교우들이 나를 광주리에 담아 성벽의 창문으로 내려 주어서, 나는 그 손에서 벗어났습니다.”  (vv. 28-33)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을 또한 우리는 잘 압니다. 


5.        

새 사람, 주님의 사도가 되어 주님의 말씀을 받아 안고 떠난 길. 그런데 흔히 우리 주변에서 듣는 간증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고난 끝에 다다라 누리는 복 받은 삶, 축복의 삶, 행복한 삶, 성공한 삶과는 거리가 있어도 꽤 있는 삶입니다. 솔직히 따라 살고 싶은 삶은 아닙니다. 꺼려지는 삶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래서 더욱 현실감이 있는 삶입니다. 대개 우리의 사는 삶이 그렇습니다. 꼭 이대로는 아니어도, 바울처럼은 아니어도, 산전수전, 우여곡절, 신산(辛酸)한 삶입니다. 


회심 후의 삶, 주님의 사도로서의 삶은 흔히 말하는 복은 커녕, 숨어다니고 쫓겨다니고, 매도 맞고 감옥에도 갇히고, 순풍에 돛을 달기는 커녕, 풍랑과 폭풍우 속에 죽을 고비도 한 두번이 아니고, 광야든 도시든 춥고 배고프고 잘 곳이 없는 것은 매 한가지고, 도둑과 강도에 시달리고, 게다가 같은 동족에게도 쫓겨 거의 죽다시피 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손으로 세운 교회의 교인들에게도 배신과 배척을 당하고. 부서지고 망가지고 깨지고 불안정하고 불안한 삶. 정말 말이 아닌 삶입니다. 믿는 사람의 삶이 꼭 저렇다면, 하~아, 남 몰래 한 숨이 나올 그런 삶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의 그 삶을 자랑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삶, 온전한 삶, 자랑스러운 삶이라고 말합니다. 굳이 그런 고생 사서할 이유가 있을까 싶을 만큼 참으로 힘겨운 삶인데, 그게 아니랍니다. 자랑스럽답니다. 행복하답니다. 솔직히 너무 고생스러운 삶인데 바울은 좋답니다. 감출 이유가 없답니다. 자랑합니다. 고생스럽고 힘겨운 삶인데, 그게 아니랍니다. 


나 주님을 만난 후의 나의 삶은 이렇게 행복하게 바뀌었다, 너무 좋다, 이렇게 좋아졌다, 나자렛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우리의 주님이시고 구원자시라는 것을 알고 믿고 따르는 이 기쁨, 이 즐거움, 그래서 내가 누리는 지금 이 은혜의 삶을 보라! 그렇게 사람들이 편안하게 느끼고 더불어 행복감에 빠질만하게 그리 큰 과장은 아니어도 조금은 덧대고 고쳐 들려주고 보여주면 좋을 것을. 그러면 오히려 전도도 선교도 더 잘 될 텐데. 그런 험한 삶, 고약한 현실을 조금도 빼지도 않고 약간도 꾸미지도 않은 채로, 굳이 날 것으로 다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믿는 일은 힘든 일이다, 신앙의 길은 어려운 길이다, 각오하지 않으면 주님을 믿고 따를 엄두도 내지 말라’ 하는 것도 아닐 텐데. 이게 선교 전략이고 전도 전략이라면 실수하는 것이 아닐까요? 


6.        

그러나 바울에게는 이 모든 삶 그대로가 간증입니다. 어떤 포장도 없이, 꾸밈도 없이, 감추고 덜고 넣고 할 것도 없이, 날 것 그대로의 삶이 간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겠다며 ‘쫓는 자’로 살았던 그 어두웠던 과거도 간증이고,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사도로 살면서 이제는 동료들에게 동족들에게 ‘쫓기는 자’로 사는 현재도 바울에게는 더하고 뺄 것이 없는 삶이고 그래서 간증입니다. 크게 달라지지 않을 앞으로의 삶 역시 간증입니다. 


어둠 속에 있던 나와 밝음 속에 있던 나, 계곡 저 밑에 있던 나와 저 산 정상 위에 있던 나, 화려했던 나와 말 할 수 없이 초라한 나, 쫓는 나와 쫓기는 나,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그 모든 나 안에, 그 모든 나의 삶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만난 바울. 그래서 그 굴곡 많은 나의 삶이 나만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의 커다란 무대 위에 내가 있기에, 바울은 무엇을 빼고 더하고 하지 않습니다. 나의 모든 삶이 다 간증입니다. 

(18-2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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