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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Oct 20. 2022

축복은 흐르는 강물처럼

사도행전, 그리고 교회다움 (19-1)


“. . . 바울이 의회원들을 주목하고 말하였다. ‘동포 여러분, 나는 이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오로지 바른 양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 . . ‘동포 여러분, 나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바리새파 사람의 아들입니다. 나는 지금, 죽은 사람들이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니,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 사이에 다툼이 생겨서, 회중이 나뉘었다. 사두개파 사람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하는데, 바리새파 사람은 그것을 다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 . . 싸움이 커지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길까 염려하여, 군인더러 내려가서 바울을 그들 가운데서 빼내어, 병영 안으로 데려가라고 명령하였다. 그 날 밤에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과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한다.’” (사도행전 22:30-23:11) 


photo by noneunshinboo 


1.       연어는 지금 어디서 안녕할까? 

산란을 위해 작년까지 이맘때가 되면 밴쿠버를 찾았던 그 많던 연어가 올해는 상류로 오르는 물 길이 말라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연어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괜찮을까? 안녕할까? 혹시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작년 이맘때의 그 많던 비가 올해에는 좀체 올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건 무슨 문제가 있어 그런게 아닐까? 여기를 찾던 연어가 돌아오지 않고, 그 많던 비가 오질 않고, 그래서 연어가 없고 비가 없는 지금 여기 밴쿠버를 살고 있는 나에게 어떤 문제는 없는 것일까? 나는 괜찮은 것일까? 


마트에 가면 여전히 연어는 있고, 돈이 없어 문제지 돈만 있으면 언제든 연어 회와 초밥을 마음대로 사 먹을 수 있으니, 올해 보이지 않는 연어는 나에게 별 문제가 안 되는 것일까? 수도꼭지만 틀면 시원스레 물은 나오고, 커뮤니티 가든에도 충분히 물을 줄 수 있으니, 그럼 비가 오지 않는 지금이 우리에게는 그리 큰 문제가 안 되는 것일까? 그런데 정말은 우리에게, 우리 사람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중요한 그 무엇을 우리가 지금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아직은 괜찮고, 내 가족이 아직은 괜찮고, 우리 공동체가 아직은 괜찮고,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직은 안녕하다면, 그렇다면 모든 것이 다 괜찮은 것일까? 


혹시, 작년까지 끓어 오르던 믿음이 그만 식었다면, 몇 달 전까지 분명 품고 있던 소망이 벌써 많이 가버렸다면, 며칠 전까지 느꼈던 사랑의 설레임이 벌써 잦아들었다면, 그래도 괜찮은 것일까? 혹시, 교회 안에 주님을 향한 믿음, 소망, 사랑이 기억과 추억으로만 있다면, 그런데도 나에게 별 일이 없고, 우리가 큰 문제를 느끼지 않고 있다면, 우리가 안녕하다 느낀다면 그건 괜찮은 것일까? 주님께 받은 복이 너무 많고, 받은 은혜가 너무 크고, 그래서 나는 지금 안녕하고 그래서 우리는 지금 괜찮은 것일까?


2.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았다,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가만히 보시니 너무 좋았다 하셨는데 (창세기 1:31-2:1). 그때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다 이루었다 하셨다는데. 그래서 편안히 쉬셨는데. 그런데,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로 인해 모든 것이 그때부터 죄다 어그러졌다, 그렇게 쉽게 남 얘기 하 듯이 말할 수 있을까요? 내 탓이 아니다, 내 잘못이 아니다, 할 수 있을까요? 집으로 돌아올 길이 없어져 바다를 떠도는 연어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 . .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곧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 . .” (로마서 8:19-25)


우리 사람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또한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으리라는 소망은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복음입니다. 참 기쁜 소식입니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이라는 그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그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그 사랑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그게 다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게 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게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3.       부활 소망 때문에 . . . 

“그런데 바울이 그들의 한 부분은 사두개파 사람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파 사람인 것을 알고서, 의회에서 큰소리로 말하였다. ‘동포 여러분, 나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바리새파 사람의 아들입니다. 나는 지금, 죽은 사람들이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3:6)


부활 소망이면, 그 소망을 잡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닐까? 내가 지킬 수 있는 것들 지키며, 조용조용, 가만가만 경건하고 신실한 신앙인으로, 착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 되는 게 아닐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건 시작에 불과하다, 부활의 주님을 보는 것, 경험하는 것. 그래서 부활의 소망을 갖는 것, 그리고 그 부활의 믿음을 갖는 것. 그리고 그 부활의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이 땅에서 부활을 살아내는 것의 시작이다 말합니다. 끝이 아니다 말합니다. 그 부활의 주님, 그 부활의 소망, 믿음, 사랑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바울입니다. 그 소망 때문에 지금까지 쫓겨 다니고, 숨어 다니고, 매도 맞고, 감옥에도 갇히고. 그리고 여기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지금은 그러나 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부활 소망을 전하기 위해 아테네를 찾았던 바울은 그 옛날 소크라테스가 섰던 최고 법정에도 섰었습니다. 그리고 겨우 풀려난 바울은 그 부활 소망,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을 전한다고 예루살렘 법정에 지금 서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테네 법정에서도, 여기 예루살렘 법정에서도 당당합니다. 그것은 지금 바울을 재판하는 그 사람들이 사실은 재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고, 또한 머지않아 우리의 재판관이신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을 바울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대문입니다. 부활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당당합니다. 움츠러 들 수 없습니다. 




4.       회칠한 벽이여 . . .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바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 네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너는 이상하다, 여기서 떠나라, 여기서 그만 끝내자, 아니 여기서 너를 반드시 끝장을 내주겠다.” 

그렇게 작정한 사람들에게 바울이 말합니다. 

“회칠한 벽이여, 하나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오. 당신이 율법대로 나를 재판한다고 거기에 앉아 있으면서, 도리어 율법을 거슬러서, 나를 치라고 명령하시오?” (사도행전 23:3)


저들은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금이 가 있고, 틈이 벌어져 있고, 군데군데 깨진 채로 있는, 머지않아 무너질, 이미 무너진 회칠한 벽입니다. 주님께서는 바울 사도를 통해 우리가 그런 회칠한 벽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좋아는 보이고, 괜찮아는 보이는 회를 칠한 벽. 누구를 재판할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재판을 받아야 하는 사람인 저들 처럼은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가 이렇게 그들을 치는 까닭은, 그들이 내 백성을 잘못 인도하였기 때문이다. 무엇하나 잘 되는 것이 없는데도 잘 되어 간다고 하여 백성을 속였기 때문이다. 내 백성이 담을 세우면, 그들은 그 위에 회칠이나 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너는, 회칠하는 자들에게, 그 담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하여라. 내가 소나기를 퍼붓고, 우박을 쏟아내리고, 폭풍을 일으킬 것이니, 그 담이 무너질 때에, 그들이 발랐던 그 회칠이 다 어찌되었느냐고, 비난하여 추궁할 것이라고 하여라. 그러므로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분노하여 폭풍을 일으키고, 내가 진노하여 폭우를 퍼붓고, 내가 분노하여 우박을 쏟으면, 그 담이 무너질 것이다. 너희가 회칠한 그 담을, 내가 허물어서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그 기초가 드러나게 하겠다. . . . 예루살렘을 두고 예언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과, 전혀 평화가 없는데도 예루살렘에 대하여 평화의 환상을 본 사람들이 사라졌다' 할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에스겔서 13:10-16)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하신 이 말씀은 그때 그 당시의 거짓 예언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없애지 못해 안달했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과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부활은 없다, 부활은 거짓이다, 부활의 소망은 헛된 소망이다, 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부활은 있다, 부활은 참이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거짓이다 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부활의 예수를 믿고 그 부활의 예수를 전하는 바울을 이번엔 가만두지 않겠다 어떻게든 하겠다 작당하고 모의하는 사람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더 이상은 가만두지 않겠다, 기어코 가두겠다, 멈추게 하겠다, 흐르지 못하게 막겠다, 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은 참이다, 부활의 소망은 우리가 가져야 할 참 소망이다, 믿음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부활의 소망을 이미 갖고 있고, 그 은혜와 축복을 우리는 이미 받았고, 그래서 우리는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안녕하고 괜찮고 좋다 하는 사람들. 그러나 그렇게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 그 부활의 소망이 다른 어디로 가지 못하게 내 집 안에 꽁꽁 묶어 두고, 거기 웅덩이를 파고, 저수지를 파고, 흐르는 강물의 그 물줄기를 나에게만 돌리겠다 둑을 쌓고 보를 만들고 댐으로 막으려는 사람들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부활의 소망은 분명 있으나 그만 나에게 와서 멈추어 있고, 그래서 고여 있는 삶을 살고, 이웃에게 감추어진 삶을 살고,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안으로 꼭꼭 숨어 갇힌 소망을 사는 사람들에게 또한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다른 피조물들까지는 신경 쓰지 않겠다, 하는 사람들에게 또한 하신 말씀입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5.       축복의 통로 

하지만 어떻게 한다고 해서 흐르기를 그만 멈추는 축복의 강이 아닙니다. 아무리 애쓴다 해서 둑과 보와 댐에 갇힐 은혜의 강물이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만 헛 수고를 멈추라고 바울의 입을 빌어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회칠한 벽으로 있지 말라, 금이 가고 깨진 벽을 감추려 하지 말라, 그만 하라’, 하십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나를 부수어 다시 그 강물이 흐르게 하라’ 하십니다. ‘부활 소망은 흐르는 강물이다, 흐르고 흘러 저 태평양 드넓은 바다로 다다를 것이다, 거기 하나님 품으로 함께 안길 것이다’, 하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의 첫 열매’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리고 교회는 그래서는 안 된다 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고 교회는 그래서는 안 된다 하십니다. 우리는 가만히 멈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고, ‘축복의 통로가 되는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창세기 12:1-3) 


우리는 주님의 그 소망의 통로입니다. 우리가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미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일은 이미 우리 모두에게 맡기셨습니다. 나 때문에, 우리 때문에 모든 나라와 민족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궁금합니다. 왜 우리가 꼭 그래야 하는지,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으면 그만이지, 굳이 그 통로가 되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19-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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