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그리고 교회다움 (19-2)
“. . . 그 날 밤에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과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한다.’” (사도행전 22:30-23:11)
1. 족보가 있는 집안
“예수께서 활동을 시작하실 때에, 그는 서른 살쯤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기로는 요셉의 아들이었다. 요셉은 엘리의 아들이요, 그 윗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맛닷, 레위, 멜기, 얀나, 요셉, . . .시므온, 유다, 요셉, . . . 나단, 다윗, 이새, 오벳, 보아스, . . . 유다, 야곱, 이삭, 아브라함, . . . 셈, 노아, . . . 에녹, . . . 에노스, 셋, 아담에게 이르는데,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누가복음서 3:23-38)
족보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누가복음서 3장에서 전하는 예수님의 족보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족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우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태어났으니, 그렇게 만들어졌으니, ‘축복의 통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시작된 집안에서 태어난 우리는 그 아빠의 그 아들과 그 딸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정하고 싶고, 부인하고 싶고, 거부하고 싶고.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기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부르신 우리인데. 그러니 그 아버지의 그 자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게 싫다면 호적을 정리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복음서 1:4)
그리고, 그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요 1:9)” 고 전합니다.
호적을 정리한다고 끝이 날 문제는 아닙니다. 주님께 혹여 머리카락이라도 보일까 싶어, 길 가 전봇대 뒤에, 친구 집 담장 밑에, 내 집 장독대 뒤에 꼭꼭 숨어 있을 수 없습니다. 시내 산, 나를 비추셨던 그 하나님의 빛을 숨기겠다 감추겠다 못 본 척 하겠다 남들에게 들키지 않겠다, 아무리 수건으로 나의 얼굴 빛을 숨긴다고, 방한복을 몇 겹으로 껴 입는다고 그 빛을 감출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숨바꼭질 할 생각도,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생각도 아예 말아야 합니다.
우리 사람뿐만 아니라 하늘 그 위와 그 아래, 땅 그 위와 그 아래 있는 모든 것은 다 그 말씀을 통해, 그 생명의 빛으로 생겨났고 태어났고 만들어졌고, 그 하나님의 영의 첫 열매가 우리이니 우리는 꼼짝없이 모든 피조물의 축복의 통로로 살아야 합니다. 옵션이 아니라 기본 사양입니다. 필요 없을 것 같아 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필요하면 나중에 추가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부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명령입니다.
2. 갇힌 몸
나를 만드신 그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세상에 있기도 전부터 나를 아셨고 보셨습니다. 벌써 훨씬 전에 나를 택하셨습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그의 종으로 삼으셨다. 야곱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불러모으시려고, 나를 택하셨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귀한 종이 되었고, 주님은 내 힘이 되셨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내 종이 되어서,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고 이스라엘 가운데 살아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네게 오히려 가벼운 일이다.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미치게 하려고, 내가 너를 ‘뭇 민족의 빛’으로 삼았다.” (이사야서 49:5-6)
나를 우리를 빛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냥 종이나 하인이나 노예가 아니라 모든 민족의 빛으로 삼으셨습니다.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여러 선택지 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냥 나를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니, 꼼짝없이 갇힌 몸입니다. 그러나 창살 있는 감옥, 혹은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하나님의 아들, 생명의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안에 갇힌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이방 사람 여러분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갇힌 몸이 된 나 바울이 말합니다. . . .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그 비밀을 계시로 알려 주셨습니다. . . . 그 비밀의 내용인즉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 사람들과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몸이 되고, 약속을 함께 가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 . .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 가운데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을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영원 전부터 감추어져 있는 비밀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모두에게 밝히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제 교회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리시려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하신 영원한 뜻을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 . .” (에베소서 3:1-13)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 비밀의 내용과 그 계획을 널리 알리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나만 복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만 비밀을 알면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냥 왔다 나에게서 멈추는 복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만 간직할 비밀이 아닙니다.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싫습니다. 받은 축복 고스란히 나를 위해, 우리 가족을 위해서만 사용할 것입니다. 싫습니다. 남들에게도 전하고 알리고 통로가 되는 일은 우리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십니다. 이방인들에게 그리고 세상 모든 나라와 민족에게 당신을 알리고, 당신의 복음을 전하고, 당신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은 우리 몫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실 일이고, 바울 사도 같은 특별한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고 교회는 이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미 그 하나님의 비밀을 알아버린 이상, 우리는 그리고 교회는 그 복을 받은 이상 통로가 되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비밀을 알게 된 이상 그 은혜와 복을 나누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쉽지 않습니다. 지금 바울 사도를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선교 역사가 그걸 잘 보여줍니다. 시작도 전에 겁이 납니다.
3. 용기를 내어라! 가라!
그리고 그런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날 밤에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과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한다.’” (사도행전 23:11)
용기를 내어라!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주님도 아십니다. 용기가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길입니다. 주님도 잘 아십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로 가는 길은 호기롭게 호쾌하게 호방하게 뚫린 길입니다. 그러나 보기와는 달리 그리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길이 아니라는 것을 주님은 잘 아십니다. 로마 제국의 전차가 달리고 말이 달리는 잘 닦인, 그러나 서슬이 퍼런 길, 시원스럽게 뚫린 그러나 살벌한 길입니다. 분명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길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그때 거기 바울 곁에 서서 가만히 말씀하셨던 그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 .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서 28:18-20)
늘 함께 계신 주님. 그 주님이 바로 바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 위에서 만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인해, 그 부활 소망으로 인해,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바울과 함께 계셨던 그 주님을 믿고 거침없이 달려온 바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헬레니즘의 심장부, 문화 예술 그리고 철학의 중심지인 아테네로 가서 그 부활 소망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헤브라이즘의 심장부, 종교의 중심지인 여기 예루살렘에 바울은 와서 부활 소망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팍스 로마나, 모든 길은 여기 한 곳으로 향한다는 거기 세상의 심장부, 정치 경제 그리고 권력의 중심지, 명실상부한 지금 사는 세상의 중심지인 로마로 이제 바울은 부활 소망을 전하기 위해 갈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라 하셨고, 주님께서 또한 함께 하실 것을 알았고 믿었기에 바울은 그 곳으로 갈 것입니다. 만만치 않은 길, 호락호락하지 않은 길, 그러나 가야 할 길, 내가 살고 너도 살고, 그래서 우리 모두 더불어 함께 사는 길이기에 바울은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어 갈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너무 걱정은 말아라. 너희 혼자 가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서 부탁하여 아버지께서 당신의 영을 너희에게 보내도록 하겠다.”
그래서 그 주님의 영은 오셨고, 그 주님의 영은 바울 사도와 아테네도 예루살렘에도 함께 하셨고, 그리고 이제 로마에도 함께 가실 그 주님의 영은 지금 오늘 여러분과 제 곁에서 함께 하십니다. 그 주님의 영이 곧 축복이고 또한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영을 통해 주님은 가만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너희를 저기 사람들에게, 네 이웃 가운데로 보내겠다. 여기 교회 안에서 너희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너희의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하고, 또한 하나님의 일을 모여 증언하는 것과 같이 저기 사람들에게, 네 이웃에게 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살고, 하나님의 일을 증언하여야 한다. 가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한 그 축복의 통로가 이제 너희가 되어야 한다.”
앞에 받았던 축복은 뒤에서 오는 축복에 자리를 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축복의 통로입니다. 비워진 듯 채워지고 채워진 듯 비워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주님께서 주신 은혜와 복을 받고 보내고, 또 받고 보내고, 다시 받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더욱 생생히 느낄 수 있고,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에게 기억과 추억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현실로 있을 수 있습니다.
4. 나를 통해 흐르는 축복
그러니,
“너는 땅 끝까지 가라! 멀리 이방 사람들에게로 가라! 가서, 나의 복음을 전하라! 용기를 내어 이제 로마로 가라! 가서, 나의 축복의 통로가 되어라!”
그러나 오해는 말아야 합니다. 너무 속 좁게 듣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 말씀이 단지 사람들에게만 가라, 가서 사람들에게만 축복의 통로가 되라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사람 이웃’만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작년 이맘때 왔었던 그 연어들에게, 올해 돌아오지 못한 연어들에게, 그리고 아직 저기 갈 곳을 잃고 태평양 바다를 떠돌고 있을 연어들에게, 그리고 내년 이맘때 다시 찾아올 연어들에게 또한 창조주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좁은 이웃이 아닌 훨씬 넓은 이웃을 넓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너무 좋았다 하셨던 것은 우리 사람들 뿐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사람들 보다 먼저 창조하셨던 그 연어들이 사실은 먼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또한 보시기에 너무 좋으셨습니다. 아직도 온다는 소식이 없는 밴쿠버의 비 또한 그 한처음 하나님께서 만드셨을 때에 보시기에 너무 좋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비를 이제나 저제나 눈 빠지게 기다리는 모든 동식물들 역시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너무 좋았다 하셨습니다.
지금 밴쿠버의 비를 기다리는 풀과 나무와 동물들에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이 모두 한 분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리의 이웃이요, 우리의 동료 피조물이기에 우리는 그 모든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에게 당연히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우리 서로에게, 그리고 우리 사는 이곳 이웃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만나고 마주치고 또한 함께 살아갈 이름도 얼굴도 아직은 모르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님의 부활의 소망,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연어는 다시 돌아올 채비를 할 것이고, 비는 다시 돌아와 내릴 것이고, 그래서 시냇물은 생명으로 뛸 것입니다. 산불은 잦아들어 사그라들 것이고, 다시 잔디는 파랗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나의 이웃으로 흘려 보낼 때 우리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부활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냥 부활의 소망을 갖는 사람들이 아닌, 부활을 사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이웃은 우리를 통해 통해 주님을 보게 될 것이고 주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바울처럼 로마로 가진 못해도, 여기 우리 이웃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전하며 창조주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