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그리고 교회다움 (20-1)
“닷새 뒤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몇몇 장로와 더둘로라는 변호사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에게 바울을 고소하였다. 바울을 불러내니, 더둘로가 고발하여 말하였다. ‘벨릭스 총독님, 우리는 총독님의 덕분으로 크게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하의 선견지명의 덕택으로, 이 나라에서는 개혁을 많이 이룰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면으로나, 또 어디에서나, 이것을 인정하며, 감사하여 마지않습니다. 나는 총독님을 오래 방해하지 않겠으니, 너그러우신 마음으로 우리의 고발을 잠깐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본 바로는, 이 자는 염병 같은 자요,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소란을 일으키는 자요, 나사렛 도당의 우두머리입니다. 그가 성전까지도 더럽히려고 하므로, 우리는 그를 붙잡았습니다.’” (사도행전 24:1-6)
1. 우리의 평화를 깨는 사람
“그 사람은 갈릴리에서 시작해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온 유대를 누비면서 가르치며 백성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눅 23:5)
그때 대제사장들과 무리들이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끌고 가 고발한 이유입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인데, 우리 도시를 소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행 16:20)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던 이유입니다.
에베소에서도 그리고 아테네에서도 마찬가지 이유로 바울은 곤욕을 치르고, 감옥에 갇히고, 재판에 회부된 이유입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예루살렘. 그리고 비록 갇힌 상태지만 죽이겠다 달려드는 사람들을 겨우 피해 도착한 여기 가이사랴입니다.
그런데, 악착같이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장로들 그리고 더둘로라는 일급 변호사를 대동한 채 바울을 고발하기 위해, 재판정에 세우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여기까지 따라왔습니다. 그 이유는 같습니다.
“이 바울이라는 자는 전염병과 같은 자요,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소란을 일으키는 자요, 나사렛 도당의 우두머리입니다. 게다가 그가 성전까지도 더럽히려 해서 우리가 그를 붙잡았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비롯한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유한 대제사장 가문의 후예로 유대 귀족층입니다. 유대 사회의 종교 지도자입니다. 또한 산헤드린, 즉 공의회를 통해 정치적으로도 유대 사회를 지배합니다.
지금 로마 제국과 함께 유대를 지배하는 살아 있는 실질적인 권력자들입니다. 로마 제국의 평화가 곧 유대의 평화, 그리고 자신들의 평화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평화와 안녕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하고 당연히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로마 제국, 하나님의 평화와 로마 황제가 가져온 평화가 공존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마 10:34)
저렇게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는 예수를 당연히 가만 놔둘 수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너희가 죄 없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 12:7-8)
저들이 생명과도 같이 여기는 율법도 안식일도 무시하는 예수를 가만 놔둘 수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저들의 정치, 경제, 종교의 터전이요 근간인 성전에 들어와 상인들과 환전상들을 내쫓고 난장판으로 만든 예수를 가만 놔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평화를 찾나 싶었습니다.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죽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그 나사렛 예수가 살아있을 당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죽은 예수, 아니 부활했다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고 떠들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 바울이 바로 그 예수의 도당, 그 나사렛 도당의 우두머리입니다. 가만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세상을 소란스럽게 만들고,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나아가 위협하는 사람을 그냥 놔둘 수 없습니다. 그러니, . . .
“하나님의 평화와 로마 황제의 평화가 말 그대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지금 여기를 뒤흔드는 트러블메이커, 평화를 깨는 사람, 바울을 고발합니다. 단지 우리 유대인들의 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로마 제국의 적입니다. 하나님의 적일 뿐 아니라 로마 황제의 적입니다. 유대 땅을 소란스럽게 할 뿐 아니라 로마 제국을 소란하게 하는 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힐 뿐 아니라, 살아 있는 신이신 로마 황제의 성전도 더럽힐 것입니다. 처벌하십시오.”
2. 당연하다 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된 순간
살면서 종종 당연하다 했던 것이 더 이상은 당연하지 않게 되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당황합니다. 당연하게 누려오던 평온한 일상이 흔들리는 순간이 찾아오면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이건 뭐지?’ 당연했던 것이,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이, 더 이상은 당연하지 않게 된 그 순간, 우리는 혼란스럽습니다.
이러다 말겠지, . . . 다시 그 때로 돌아가겠지, . . . 그런데, 지금 이 당연하지 않은 상황이 한 동안 지속될 가능성이 점점 뚜렷해지면 그래서 속으로만 담아두었던 우려가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불안이 내 안에서 자랍니다. 나의 불안이 우리의 불안이 커집니다. 쉽게 바꿔질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지면 이젠 분노로 급격히 상승합니다.
분노는 그 특성상 가만히 있질 못합니다. 분노는 언제까지나 내 안에 담아둘 감정이 아니고 소중히 보관할 물건도 사실 아닙니다. 그래서 분노는 나의 밖으로 향합니다. 밖으로 뛰쳐나간 분노는 혐오와 증오로, 그리고 폭력이라는 너무 손쉬운 출구를 찾아냅니다. 배출구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 당연했던 그 때로 완전하게는 아니라 할지라도 어느 만큼 그때로 돌아갈 가능성이 보이고, 그 가능성을 넘어 조금씩 부족하지만 당연했던 그때로 하나하나 돌아갑니다. 그러자 불만도 불안도 조금씩 잦아듭니다. 그리고 분노 역시 잦아들고, 폭력도 잦아듭니다. 똑같지는 않지만 조금씩 예전의 평온한 일상으로 하나 둘 돌아가고, 어느 정도의 평화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지난 팬더믹 3년여의 시간입니다. 물론 지금도 그 터널을 다 빠져나오지는 못했습니다.
3. 종말론이 대세?
올해 2022년 미국 기독교 출판계 동향을 다룬 기사입니다. ‘종말론’입니다. 올해 미국 기독교 출판계의 대세는 놀랍게도 ‘종말론’이라고 합니다. 이 기사는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 기후변화 등으로 혼란스러운 시대 분위기가 기독교 출판계에선 ‘종말', ‘아마겟돈', ‘휴거', ‘재림' 등의 주제를 담은 책들로 투영되고 있다” 고 하면서, “오늘날 발생하고 있는 세계사적 사건과 함께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종말론에 대한 독자들의 요구가 급증하고 있다” 는 종말론을 다룬 책을 출간한 한 출판사의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휴거 공포는 새로운 영역의 연구과제다. 종교적 트라우마가 공포, 우울증, 편집증과 함께 강박증까지 유발할 수 있다. 이들은 지구상에 홀로 남겨질 수 있다는 공포를 갖고 있다” 는 한 종교 리서치 센터의 말을 아울러 전합니다.*
흔들린 일상. 균열을 보이는 평화. 당연했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된 순간 일어난 혼란. 그리고 우려와 기대와 희망. 그리고 상당 기간 지체가 되는 ‘백 투 노멀’로 인한 불만과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분노. 그로 인한 혐오와 증오와 폭력. 그리고 완벽하진 않지만 조금씩 예전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일상. 그리고 독감 백신과 함께 코로나 백신을 맞으라는 이메일이 날아오는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꿋꿋하게 신앙을 지켜냈고 다시 교회로 모였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솔직히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현실과 신앙 사이에서 겪는 혼란스러움은 아주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조금 일상의 여유를 찾으니, 지난 3년의 시간들을 돌아볼 짬이 생겨 뭔가 답을 찾습니다. 그러나 지난 3년간 벌어졌던 일들, 그리고 지금도 일어나는 그 일들의 근원적인 이유를 찾고, 그래서 더 나은 세상,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계획을 세우고, 그러면 좋을 텐데. 그런데 아직 거기까지 가지 않은 듯 합니다. 대신, 그런 일이 또 일어난다면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디로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세상은 그리고 나는 어떻게 될까, 그 답 먼저 찾고 싶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종말론’으로 달려가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미국 출판계의 동향처럼, 종말론이 그 답이라면, 휴거가 흔들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의 진정한 답이라면,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로 그 종말론, 휴거들이 대세로 자리를 잡는다면, 그건 참 난감하고 고약한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런 현상이 과연 옳은가, 그른가, 단정지어 말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종말론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대세여서는 안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종말의 때’를 우리가 살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종말론이 대세인 세상을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는 아닙니다. 분명 지난 3년을 지나면서 ‘절망’을 그 출구로, 우리의 답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분명 환영할 일입니다. 그렇다고 종말론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당장 공중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 휴거. 그것이 정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답이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요?
1990년대 한국에서 일었던 그 웃지 못할 휴거 소동 때문만은 아닙니다. 잊을 만하면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그 선지자들과 보혜사들과 교주들과 또한 그들이 말하는 아마겟돈의 현상들과 휴거가 일어날 때와 장소들 때문만도 아닙니다. 물론, 이 기사에서 언급하는 그 종말론 관련 책들이 그런 소동을 일으키는 류의 책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책들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종말론이 대세여서는 안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며,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 (마 6:9-10)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단지 손 놓고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이미 이 땅 위에 왔고, 그래서 이 땅 위에 있는 그 나라. 주님께서 다시 오시어 완성하실 그 ‘하나님 나라’를 오늘 지금 여기 부족하지만 살아내야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그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하루하루 일상과 삶으로 부지런히 살아갑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 (행 1:11)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신 뒤에도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하늘만 쳐다보던 제자들도 천사의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모여 기도했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때가 되어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고, 또한 그 성령을 통해 동행하시는 부활의 주님과 함께 부활 소망 속에 부활의 주님을 전하며 부활의 삶을 열심히 살았습니다.
온갖 박해와 핍박과 고난, 정말 불안과 공포와 혼란과 혼돈의 나날들을 보내면서도, 그게 세상이 끝이 아니면 어떤 것이 끝일까 싶게 어둔 시대를 살면서도, 바울 사도와 베드로 사도, 그리고 그 많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부활 소망을 잡고, 부활의 삶을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렇게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팬더믹과 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이상 기후로 인한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 속에 그리스도인들이 찾는 곳이 ‘종말론’이고 ‘휴거’라면 글쎄 그건 참 불편한 일입니다.
(20-2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