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그리고 교회다움 (20-2)
“그러나 나는 총독님께 이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내가,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그 ‘도’를 따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것을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는데, 나를 고발하는 이 사람들도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곧 그것은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의 부활이 장차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없는 양심을 가지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나는, 내 겨레에게 구제금을 전달하고,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려고, 여러 해 만에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 . 다만 나는 그들 가운데 서서 말하기를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은, 죽은 사람들의 부활과 관련된 문제 때문입니다’ 하는 이 한 마디 말을 부르짖었을 뿐입니다.” (사도행전 24:14-21)
1. 하나님의 소송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은, 죽은 사람들의 부활과 관련된 문제 때문입니다.” (24:21)
부활과 관련된 소송입니다. 그냥 죽은 사람들이 부활하느냐 안 하느냐, 그런 것을 다루는 소송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부활에 대한 소송입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우리를 이렇게 오랫동안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주님의 목장에 있는 양 떼에게서 진노를 거두지 않으십니까? . . . 주님께서 세워 주신 언약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억눌린 자가 수치를 당하고 물러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가련하고 가난한 사람이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일어나십시오. 주님의 소송을 이기십시오. 날마다 주님을 모욕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버려두지 마십시오. 주님께 항거해서 일어서는 자들의 소란한 소리가 끊임없이 높아만 가니, 주님의 대적자들의 저 소리를 부디 잊지 마십시오. (시편 74:1ㄱ, 20ㄴ-23)
‘하나님의 소송’입니다. 지금 하늘에 오르시어 아버지 하나님 오른쪽에 앉아 나를 지켜 보시는 그 부활의 주님에 대한 소송입니다. 사람인 로마 총독, 펠릭스가 감당할 사안이 아닙니다. 피고소인이 하나님이십니다. 피조물인 사람이 그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고발한 사건입니다. 애초에 대제사장이 돈을 주고 고용한 변호사를 데려와 고발할 수 있는 그런 소송 사건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총독 각하, 너그러우신 마음으로 우리의 고발을 들어주십시오. 친히 이 자를 신문하여 보시면 왜 그를 고발했는지 다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펠릭스 총독은 재판장이 될 수 없습니다.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당신들의 소송을 처리하겠소.”
그러나 지금 이 소송은 펠릭스 총독이 처리할 수 있는 소송이 아닙니다.
“하나님,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주님께서 이루신 그 놀라운 일들을 전파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하여 놓은 그 때가 되면, 나는 공정하게 판결하겠다. 땅이 진동하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흔들리고 비틀거릴 때에, 땅의 기둥을 견고하게 붙드는 자는 바로 나다. 오만한 자들에게는 오만하지 말아라 하였으며, 악한 자들에게는 오만한 뿔을 들지 말아라. 오만한 뿔을 높이 들지 말아라. 목을 곧게 세우고, 거만하게 말을 하지 말아라 하였다.’ 높이 세우는 그 일은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않고, 남쪽에서 말미암지도 않는다.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만이, 이 사람을 낮추기도 하시고, 저 사람을 높이기도 하신다.” (시편 75:1-7 )
오직 하나님만이 재판장이십니다. 그런데 그 재판장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소를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 하나님께는 아들과 함께 증인이십니다. 변호인도 되십니다. 그리고 바울은 사실 피고소인이 아니라 증인입니다. 증언을 하기 위해 여기 서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 사도는 평온합니다. 평화롭습니다. 호기롭게 바울을 고발하는 대제사장이나 그 원고측 변호인이 아니라, 또 그 바울의 목줄을 쥐고 있다 재판장으로 착각하는 로마 총독이 아니라, 바울이 평온하고 평화롭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지금 우리 사는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의 시대, 그야말로 종말적인 시대를 사는 바울이지만 오히려 그 누구보다 평온하고 평화롭습니다. 지금 이것은 하나님의 소송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긴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절망의 끝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바울에게 있어 대세는 세상을 호령하는 로마 제국도 아니고, 자기들만의 찻잔 속 평화를 깼다 난리치는 대제사장도, 장로들도, 사두개파 사람들도, 바리새파 사람들도, 율법학자들도, 헤롯 왕도, 로마 황제도, 로마 총독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로 인한 종말론도, 아마겟돈도, 휴거도 아닙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바울에게 대세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지금 바울의 생명줄은 ‘부활의 주님’과 맞닿아 있습니다.
2. 부활 신앙, 그때도 옳았고 지금도 옳다
부활의 그리스도 예수, 부활의 신앙때문에 재판정에 서 있는 바울 사도가 오늘 우리 앞에 서 있다면, 그래서 지금 여기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를 어찌할까요, 우리가 묻는다면 그는 무어라 우리에게 말할까요?
“그래 종말이 임박했다. 휴거를 대비해라. 아마겟돈이다. 이번에는 진짜 말세다. 곧 그 날이 온다. 곧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할까요?
아니면, 이렇게 말할까요?
“나는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고, 또한 내일도 하나님께 소망을 둘 것이다. 나를 고발하는 이 사람들도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것은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의 부활이 장차 있으리라는 것이다. 나는 그 부활 소망을 붙들고 있다. 나는 그 날이 정확히 언제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과 상관 없이 나는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없는 양심을 가지려고 힘쓸 것이다. 나는 다시 내 겨레에게 구제금을 전달할 것이고,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성전에 갈 것이고, 피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다시 찾을 것이다.”
분명 바울은 오히려 더욱 그 부활의 주님, 그 부활 신앙을 전하기 위해 온 힘을 다 할 것입니다. 부활 소망이 더욱 확고하게 그의 일상의 기준이 될 것이고, 그의 삶을 채울 것입니다. ‘의롭다’ ‘의롭지 않다’를 가르는 기준점이 부활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기에, 그는 의롭게 살려고 더욱 노력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흠없는 사람으로, 깨끗하고 거리낌없는 양심으로 살려고 애쓸 것입니다. 나의 이웃을 그리고 내 동족을 돕기 위해 이리저리 더욱 뛰어다닐 것이고, 구제금을 모으기 위해 동분서주할 것이고, 구제금을 전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예루살렘을 찾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거기 멈추지 않고 다시 아테네로, 다시 로마로 향할 것입니다. 거기 다시 가서 부활의 주님을 전하고 또 전할 것입니다. 함께 부활 소망을 살자고 외칠 것입니다. 그러다 또 잡혀 매를 맞을 것이고, 감옥에도 갇힐 것이고, 오늘처럼 재판정에 다시 설 것입니다. 결코 불안과 공포와 절망은 부활의 주님, 그 부활 신앙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 부활 신앙을 사는 바울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3. 그리고 내일도 오늘처럼
우리 사람들은 역사이래 늘 말세를 살고 있습니다. 종말론이 대세가 되었던 때도 늘 있었습니다. 1차 대전 때도 그랬고, 2차 대전 때도 그랬고, 미국과 러시아의 핵 미사일 위기 때도 그랬고, 밀레니엄을 앞두고도 그랬고, 또 팬더믹이 오자 또 그랬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당연한 일상이 조금만 흔들려도, 당연한 평화에 조금만 틈이 생겨도 사람들은 ‘종말', ‘아마겟돈', ‘휴거', ‘재림'을 다룬 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으로 달려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책들을 다 읽기도 전에 다시 잠잠해질 것입니다. 다시 장미 빛 인생을 노래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마 24:36)
결국, 우리가 잡아야 할 대세는, 예수님께서도 ‘모른다’하시는 그 ‘종말의 때’가 아니라, 지금 여기, 나와 우리와 함께 계신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불안과 공포 속에 달려갈 곳은 그 날이 과연 ‘언제일까’가 아니라, ‘그 때가 언제인지 내가 알려주겠다’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언제가 언제이든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으니, 너희는 걱정하지 말아라’ 하시는 그 주님이십니다.
“걱정할 것들이 사방에 널려 있고, 불안해할 것들이 지천에 깔려 있고, 두려워할 것들이 셀 수도 없이 가득하다. 그러니 미리미리 대비해야 한다, 앞서 준비해야 한다, 지금도 늦었다. . . 보이지 않는 부활의 누구를 믿는다고, 그 부활을 소망한다고, 그리고 그 부활을 살겠다는 그런 택도 없는 소리 말고, 대비하자, 같이 준비하자, 지금 대세가 이것이니 우리만 따라오면 된다. 그러다 너만 낙오된다, 너만 뒤에 혼자 남게 된다.”
내 안과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맞춰, ‘불안’과 ‘두려움’에 자리를 내어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 26:41)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걸고 넘어지려는 누군가의 고소장은, 누군가의 유혹의 말은 우리를 향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불안해 말고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잡아야 할 대세는 재판장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을 잡아야 합니다.
“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 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내가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세우시며, 거기에서 넘어져서 멸망에 이르게 하십니다.” (시편 73:16-18)
‘하나님의 성소’, ‘하나님 임재’ 앞에 들어섰을 때 비로소 시인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건 나의 문제가 아니고, 나의 소송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개입된 문제이고, 하나님의 소송이라는 것. 그 사실을 알게 된 시인은 그래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나는 늘 주님과 함께 있으므로, 주님께서 내 오른손을 붙잡아 주십니다. 주님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해 주시고, 마침내 나를 주님의 영광에 참여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하니, 하늘로 가더라도, 내게 주님 밖에 누가 더 있겠습니까? 땅에서라도,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내 몸과 마음이 다 시들어가도,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마음에 든든한 반석이시요, 내가 받을 몫의 전부이십니다. 주님을 멀리하는 사람은 망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정절을 버리는 사람은, 주님께서 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 복이니, 내가 주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고,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들을 전파하렵니다. (시편 73:23-28)
또한 재판장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 편에 서 있는 바울의 고백이고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이고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불안과 두려움 속에 종말의 때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며 다시 오실 그 날을 기쁘게 기다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