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그리고 교회다움 (21-1)
“바울은 ‘나는 유대 사람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황제에 대하여 아무 죄도 지은 일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여 자신을 변호하였다. 그러나 베스도는 유대 사람의 환심을 사고자 하여, 바울에게 묻기를 ‘그대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재판을 받고 싶지 않소?’ 하였다. 바울이 대답하였다. ‘나는 지금 황제의 법정에 서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각하께서도 잘 아시는 대로, 나는 유대 사람에게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만일 내가 나쁜 짓을 저질러서, 사형을 받을 만한 무슨 일을 하였으면, 죽는 것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나를 고발하는 이 사람들의 고발 내용에 아무런 근거가 없으면, 어느 누구도 나를 그들에게 넘겨줄 수 없습니다. 나는 황제에게 상소합니다.’ 그 때에 베스도가 배심원들과 협의하고 ‘그대가 황제에게 상소하였으니, 황제에게로 갈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사도행전 25:8-12)
1. 도장(道場) 깨기
‘특정 분야에서 어려운 장벽이나 기록 따위를 넘는 일’을 ‘도장 깨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원래의 의미는 나의 무공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 혹은 내가 바로 천하 제일의 최고수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그 지역이나 전국의 유명한 무공 실력자들의 도장이나 숨은 고수들을 찾아가 무공을 겨루어 그 실력자들 꺽는 것을 말합니다.
‘도장 깨기’의 스토리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사연이 있는 듯 보이는 평범한 듯 비범한 한 사람이 산 속 깊은 곳 혹은 외딴 섬이나 바닷가, 혹은 있는 듯 없는 듯 사람들 속에 섞여 지내며, 무공을 연마합니다. 물론 거기에 스승이나 사부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개 그 스승은 이미 죽었거나 아니면 곧 죽거나 사라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만 하면 되었다, 때가 되었다 싶은 주인공은 배낭 하나, 칼 한 자루 달랑 메고 들고 길을 떠납니다. 무공이 뛰어난 고수가 어디에 있다더라, 숨은 고수가 어디에 산다더라, 유명한 무술 도장이 어디에 있다더라, 하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갑니다.
마침내 도착한 그곳의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너른 마당에 들어서니 많은 사람들이 무술 연마에 여념이 없습니다. 갓 입문한 듯 보이는 한 제자가 이 불청객을 발견하고는, ‘이건 뭐야 . . . ?’ 하며 다른 제자들과 함께 이 불청객 주위를 에워쌉니다. 그리고는 타타닥, 우수수. 가을 바람에 떨어진 나뭇잎이 됩니다. 이번에는 중간 급 정도의 제자들이 덤벼들지만 상대가 되질 않습니다. 그러자 제법 고수의 풍모의 수석 제자로 보이는 사람이 나섭니다. 그 불청객과 몇 마디의 말을 주고받더니 바로 합을 겨룹니다. 물론 상대가 되질 않습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은 아무도 나서지 않습니다. 주위를 한 번 주욱 둘러보고는 그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이만하면 되었으니, 그만 나오셔서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도장 깨기’입니다.
2. 바울의 도장 깨기
“나는 유대 사람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그렇다고 황제에 대해서나 아무런 죄도 지은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재판을 받지 않겠소?”
“아닙니다. 나는 지금 황제의 법정에 서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유대 사람에게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나에 대한 그 고발 내용에 어떤 근거도 이 사람들은 내놓질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나를 이 사람들에게 넘겨줄 수 없습니다.”
바울이 잠시 숨을 고르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겠습니다. 나는 로마로 가겠습니다. 나는 황제에게 상소합니다.”
사실 새로 부임한 총독 베스도 입장에서는 여기서 그만 재판을 끝냈으면 싶었을 것입니다. 얼마전 예루살렘에서 만난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그리고 경제적으로나 유대 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대제사장들과 다른 유대 지도자들의 간곡한 요청이 아닌 요구도 있었고 로비도 있었고, 그렇다고 바울이 로마 황제나 로마에 딱히 해를 끼친 것도 아니고 해서 총독은 웬만하면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올려 보냈으면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울이 방향을 틀어버립니다.
“나는 황제에게 상소합니다.”
당황한 총독은 급히 배심원들을 불러 한 쪽에서 논의합니다. 거부할 수 있는 이렇다 할 근거가 없습니다. 저들의 손을 떠났습니다. 바울은 저들이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절대 무공의 고수입니다. 이 무림의 고수를 상대할 사람은 오직 로마 황제 밖에 없습니다. 바울도 알고 저들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황제에게 상소하였으니, 원하는 대로 당신은 황제에게로 갈 것이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바울은 왜, 무슨 생각으로 황제에게 상소를 하는 것일까? 뭔가 믿는 구석이 바울에게는 있는 것일까?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인 것은 총독도 알고 거기 배심원들도 다 알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황제에게 상소를 하면 뭐가 달라질까? 로마에 가면, 있던 죄가 사라지고, 없던 죄는 나타나고, 그러는 걸까? 모든 게 없던 일이 되는 걸까? 아니면, 그냥 ‘시간 끌기’일까? 총독이 예루살렘의 유대 지도자들과 한통속이라는 것을 바울이 눈치챘기 때문일까? 혹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자신이 암살 당할 것이라는 것을 바울이 알기 때문일까? 로마 시민권자로서 무죄 판결이 날 가능성이 충분하다 생각하는 것일까? 물론 그런 여러 이유들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바울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다마스커스로 가던 길에서 만난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가던 길을 돌려 새로운 길로 가던 바울입니다. 아라비아로 갔었고, 이방 세계를 위한 복음 전도자가 되어 다시 다마스커스로, 예루살렘으로,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그리고 사이프러스와 안티옥을 비롯해 갈라디아 지방을 다니며, 유대 회당에 찾아 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고, 가르쳤고, 또 교회도 세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찾은 예루살렘에서 붙잡혀 지금 여기는 가이사랴에 감금된 바울입니다. 그런데,
“나를 황제에게 보내주십시오”.
바울은 총독에게 로마로 보내 달라 요청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바울의 ‘도장 깨기’의 그 최종 라운드가 시작되는 것일까요?
3. 왜 하필 로마일까?
‘도장 깨기’의 주인공에게는 대개가 주인공을 깨우치고 가르치고 단련시킨 스승이 있습니다. 보통 그 스승은 유언을 통해 제자가 가야 할 곳, 가서 해야 할 일을 알려 줍니다. 바울에게도 마찬가지로 스승이 있습니다. 바울이 가야 할 곳, 가서 해야 할 일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스승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이 다릅니다. 오히려 그 스승의 적이고 원수라 할 만한 바울에게 느닷없이 나타나서는 그를 제자로 삼고, 게다가 가장 중요한 임무도 맡긴 스승입니다. 제자가 고통과 고난 속에 혼자 있게 내버려 두지 않고, 때로는 감옥 문도 열어준 스승입니다. 때와 시기에 맞추어 이제 이곳을 떠나라, 이제 저곳으로 가라 일러주고, 또한 거기 가서 할 일들도 일러줍니다. 그의 스승이신 그리스도 주님께서 일러주신 바울의 할 일은 이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 사람들이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로마 총독에게 넘겨주려고 의로운 사람들인 척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바르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또 사람을 겉모양으로 가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고 계시는 줄 압니다. 우리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속셈을 알아채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럼, 데나리온 한 닢을 나에게 보여주시오.”
그러자 그들이 그 데나리온 한 닢을 예수께 가져다 드렸습니다.
“이 돈에 누구의 얼굴 모습과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까?”
“황제의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그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리시오.” (누가복음서 20:20-26)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입 버릇처럼 하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 ‘하나님의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사실 그것에 대해 많이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사실 감도 잘 오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조금 다르게 질문을 해봅니다.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
‘황제의 것’은 무엇일까?
‘황제의 얼굴과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은 그럼 뭘까?
‘황제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4. 그런데 뭘 돌려줘야 하는 걸까?
요단 강가에서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신 뒤,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십니다. 거기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십니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다 아는 광야의 시험 혹은 유혹 장면입니다.
사십 일 동안 금식하셔서 주님께서는 당연히 배가 너무 고프셨습니다. 이때다 싶었는지 악마가 접근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말해 보시오.”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십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은 빵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순식간에 세계 모든 나라를 예수님께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악마는 예수님께 말합니다.
“내가 지금 보여준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다 당신에게 주겠소. 이것은 나에게 넘어온 것, 나의 것이니,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내가 줄 수 있소. 그러므로 당신이 내 앞에 엎드려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십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더니, 악마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시오. 성경에 기록하기를 . . .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해서,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다’ 하였고,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소.”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였다.” (누가복음서 4:1-13)
악마는 물러납니다. 그러나 아주 물러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물러날 수 없습니다.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너는 빵으로만 살지 못하며, 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다.”
“너는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한다.”
“너는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겨야 한다.”
도대체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일까? 우리가 뭘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일까?
(21-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