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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Nov 04. 2022

아직 돌려주지 않은 황제의 것

사도행전, 그리고 교회다움 (21-2)


“. . . 나는 지금 황제의 법정에 서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각하께서도 잘 아시는 대로, 나는 유대 사람에게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만일 내가 나쁜 짓을 저질러서, 사형을 받을 만한 무슨 일을 하였으면, 죽는 것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나를 고발하는 이 사람들의 고발 내용에 아무런 근거가 없으면, 어느 누구도 나를 그들에게 넘겨줄 수 없습니다. 나는 황제에게 상소합니다. . .” (사도행전 25:8-12) 


photo by noneunshinboo


1.       돌려줘야 할 것 하나, 


다른 질문으로 바꿔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황제의 것을 황제에게’ 돌려주는 것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삶일까? 


첫 번째, 황제에게 돌려줘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넓은 들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였습니다. 날이 저물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주님. 이 사람들을 주위의 마을과 농가로 보내, 알아서 잠자리도 구하고 먹을 것도 구하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니 그러지 말고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겨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무리를 지어 앉게 하신 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시고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 모든 사람들이 그것들을 배부르게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누가복음서 9:12-17)


그때 거기 광야의 예수께서는 당신의 그 허기진 배를 위해서 그리고 당신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악마의 요구와 유혹을 분명하고 단호하게 거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그때 그 악마도 없는데, 예수께서는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드셨습니다. 물론 정말로 돌을 빵으로 만드신 것은 아닙니다. 은유입니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당신의 주린 배를 채우시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 허기진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서 돌을 빵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내놓은 그 소박한 빵 몇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그 많은 사람들이 먹고도 남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나누는 사랑, 그 나누는 마음이 주님 당신의 사랑과 마음에 가 닿아, 돌이 빵이 되었습니다. 돌이 빵이 되는 기적, 그 기적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는 거기 멈추지 않으시고, 아예 우리에게 빵이 되셨습니다.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 .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 (마태복음서 26:26-28)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한 빵이 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돌이 빵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랑이 기적입니다. 쌓아 둘 곳이 없어 땅 위의 짓고 또 짓는, 땅 위 창고에 그 가득한 빵은 하나님께는 그저 돌 무더기입니다. 그것이 황제가 땅 위에 짓고 또 지키는 창고입니다. 그래서 황제의 창고, 당신이나 지키고 있으라고 황제에게 주어 버릴 ‘돌로 가득한 창고’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하늘에 지어야 할 창고는 주님을 향한 사랑, 나를 향한 사랑, 그리고 서로를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는 하늘에 있는 ‘사랑 창고’입니다.  


2.       돌려줘야 할 것 둘, 


두 번째, 황제에게 돌려줘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앞으로 받으실 고난과 죽음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길에서 제자들은 자기들 중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일까 다툽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그러시더니, 한 아이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는 그 아이를 껴안아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마가복음서 9:33-37)


그러나 이게 처음이 아닙니다. 곧 닥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철없는 제자들은 유월절 저녁식사가 끝나자마자 한 쪽 구석에 모여 앉아 또 자기들 가운데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일까, 누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까, 말다툼을 합니다. 보다 못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뭇 민족들의 왕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한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은인으로 행세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 않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하고, 또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밥상에 앉은 사람이냐, 시중드는 사람이냐? 밥상에 앉은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누가복음서 22:24-27)


권력, 그리고 그 힘을 향한 우리의 욕망은 우리의 눈을 감게 합니다. 우리의 귀를 먹게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잡아먹습니다. 섬기는 권력이 아니라 섬김을 받는 권력, 섬김을 강요하는 권력, 사랑 없는 권력, 섬김 없는 권력. 바로 그것은 황제에게나 돌려주어야 할 ‘못된 권력’, ‘몹쓸 힘’입니다. 


그러나 위를 향한 권력이 아닌, 낮은 아래를 향한 권력, 그 권력이 우리 사람으로 오셨고, 섬기는 영으로 지금 우리 곁에 계십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을 따라 낮은 곳으로 향하는 섬길 줄을 알고 또한 그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3.       돌려줘야 할 것 셋, 


세 번째, 황제에게 돌려줘야 할 것입니다. 


권력, 그 막강한 힘은 나를 취하게 합니다. 내가 무엇이 된 듯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힘이 있습니다. 안 되는 것이 없고, 없는 것이 없습니다. 더 오를 곳이 없습니다. 다 나의 아래에 있습니다. 정상에 선 로마 황제에게 남은 것은 없습니다. 이 땅 위에는 로마 황제가 오를 곳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신이 되는 것 밖엔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는 스스로 신이 되었습니다. 


모든 권력은 그래서 종교 권력과 함께 갑니다. 종교 권력은 나를 더 높은 곳으로 오를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땅에 묶인 권력이 아니라고 유혹합니다. 그래서 종교 권력은 나를 나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땅에 묶인 사람으로 나를 보지 않습니다. 나를 자유하게 합니다. 자유한 나는 당연히 죄인이 아닙니다. 나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갖는 불만 중 하나는 이것입니다. 왜 예수는 세리같은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는 우리같이 경건하고 신실하고 의로운 사람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다르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와, 사람들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위선자들’이다.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늘 나라의 문을 닫는다.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리석고 눈이 멀었다는 것을 모르는 ‘눈 먼 인도자들’이다. ‘회칠한 무덤과 같은 사람들’이다. 겉으로는 사람에게 의롭게 보이지만, 속에는 ‘위선과 불법이 가득한 사람들’이다.” (마태복음서 23:1-36)

그러나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렇다는 것을 전혀 모릅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갑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 즉 종교권력에 가까운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권력과는 거리가 먼 세리입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자 말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여기 이 세리와는 다릅니다. 나는 일 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저기 한쪽 멀찍이 서 있는 세리는 하늘조차 우러러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애꿎은 자기 가슴만 치고 또 칩니다. 

“오,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누가복음서 18:9-14)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너무 아픕니다, 그러니 나를 용서해 주소서, 그러니 나를 고쳐 주소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가실 수 밖에 없습니다. 죄인을 위해, 아픈 사람을 위해 오셨는데, 가시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죄인이 아니다, 나는 아프지 않다’ 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가실 이유가 없습니다. 

아마도 로마 황제라면 저들, ‘난 죄인이 아니다’, ‘난 아프지 않다’ 하는 사람들에게만 갔을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아프다’ 하는 사람들 근처는 얼씬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르십니다. 교만에는 약이 없습니다. 처방을 하려고 해도 싫다 하니, 그냥 가만 내버려 둘 수밖에 없습니다. 


phobo by noneunshinboo


4.       모든 길이 정말 로마로 통할까?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쉽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쉽다면 굳이 악마가 거기 광야까지 가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유혹하고 시험하고 할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악마는 알았기 때문에 거기 갔을 것입니다. 그때 거기의 아담과 이브처럼 쉽지는 않더라도, 한 번 해 볼만 하다 싶어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르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쉽지는 않지만 너희도 할 수 있다’, 하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어렵지만 내가 함께 할 것이니 황제의 것은 ‘옛다 너나 해라!’ 던져 주고, 하나님의 것인 너, 하나님의 자녀인 너는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내가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그 ‘길’이 될 것이다. 내가 벌써 그 ‘길’을 갔었고, 지금 바울도 그 ‘길’을 가고 있고, 그 바울과 나는 함께 있다. 이제 너희의 차례다. 그 길로 가라. 나도 너희와 함께 다시 그 길을 갈 것이니, ‘도장 깨기’의 길을 가자.”


우리는 그 가는 길 여기저기 다 들를 생각 말고, 바로 로마로 가야 합니다. 시답잖은 황제의 부하들이나 상대하지 말고. 괜히 황제의 제자들입네 하는 자들과 몇 합을 겨룰 생각 말고. 황제의 것에 미련일랑은 아예 두지 말아야 합니다. ‘이거 너 해라!’ 그리고는 도장 깨기의 마지막 라운드로 가야 합니다. 

‘믿음의 길’ 그리고 ‘신앙의 도장 깨기’의 여정, 그 마지막 라운드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의 스승 주님과 함께, 지금 로마로 향하는 바울처럼 함께, 그리고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그 최종 라운드를 함께 살아야 합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확실하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제대로 돌려드리기 위해 황제에게 상소해야 합니다. 매일 로마로 가야합니다. 


“왜 내 주변엔 그리고 내 손엔 온통 돌들만 있을까? 계속되는 내일과 내일의 내일을 향한 걱정도 불안도 근심도 내 것이 아니다. 내가 끌어안고 있을 것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황제의 것이다. 

저기 보이는 산에 누구 보다 먼저 그리고 더 높이 오르겠다 모두 내 것으로 하겠다는 욕심도 욕망도 내 것이 아니다. 못 오르고 못 가져 겪는 실망도 좌절도 분노도 절망도 내 것이 아니다. 황제의 것이다.

나는 거룩하다, 경건하다, 신실하다, 의롭다, 남들과 비교하면 난 죄인도 아니다, 아니 조금 죄인이다, 하는 자만도 교만도 내 것이 아니다. 황제의 것이다. 

그래서 난 황제에게 상소한다. 그래서 난 그 모든 것을 황제에게 돌려준다.” 


5.       용기를 내어라, 이제 로마로 가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그러나 아직 황제의 것을 다 돌려주지 못한 우리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과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한다.” (23:11)

용기를 내어, 황제의 것은 확실하게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을 제대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삶,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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