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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Nov 10. 2022

기억으로만 남은 사랑

사도행전, 그리고 교회다움 (22-1)


“‘그러므로 아그립바 임금님, 나는 하늘로부터 받은 환상을 거역하지 않고, 먼저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음으로 온 유대 지방 사람들에게, 나아가서는 이방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고 전하였습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유대 사람들이 성전에서 나를 붙잡아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날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낮은 사람에게나 높은 사람에게나 이렇게 서서 증언하고 있는데, 예언자들과 모세가 장차 그렇게 되리라고 한 것밖에는 말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하셔야 한다는 것과,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부활하신 분이 되셔서,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 사람들에게 빛을 선포하시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변호하니, 베스도가 큰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 하고 말하였다.” (사도행전 26:19-24)



1.       사랑의 종교


지난 11월 1일과 2일은 오랜 기독교 전통에서 지켜온 교회의 축일입니다. 11월 1일을 ‘All Saints Day’, ‘모든 성인들의 날’, 그리고 11월 2일을 ‘All Souls Day’, ‘모든 죽은 이들의 날’이라고 하여, 교회의 성인들을 비롯한 모든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또한 마음에 새기는 날입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앞 뒤 없이 ‘툭’ 잘라내 ‘사랑’ 그 한 단어로 끝내기엔 턱없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합니다. 분명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인 것은 맞지만, 그러나 그 사랑이란 단어가 뜻하는 것이 너무 많고 그래서 오히려 모호하고 그래서 실체가 없는 그림자만 남은 단어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그냥 내뱉는 말이 아니라 나에게 살아 있어 나를 숨 쉬게 하고 나의 가슴을 뛰게 하는 한 ‘존재’와 같은 사랑이어야 하는데. 그래서 어떤 사랑, 무슨 사랑, 누구의 사랑, 누구를 사랑 . . . 그렇게 똑 부러지게 말하지 않으면, 사랑이란 말 그 자체로는 너무 빈약한 것이 되어 버리진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앞 뒤 없이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다 말 할 수 없습니다. 다짜고짜 ‘사랑’이란 그 한 단어로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원천인 ‘사랑’ 그리고 ‘사랑이신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그 주님을 믿고 따르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여정’ 그리고 모여 함께 걷는 ‘사랑 공동체’인 교회를 설명하기엔 그 ‘사랑’이란 단어는 너무 가볍습니다. 


2.       기억의 종교 


그래서 기독교는 ‘기억의 종교’입니다. 그 무엇을, 그리고 그 누군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 그 ‘한 기억’을 함께 나누고, 그리고 그 ‘한 기억’을 결코 잊지 않겠다 다짐하며 그 ‘한 기억’을 고스란히 기억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삶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 기억의 사람들의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기억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 기억의 사람들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기억하는 그 ‘누구’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기억하는 그 ‘무엇’은 바로 창조하신 세상을, 인간을, 창조하신 그 모든 것을 너무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그 아버지의 사랑으로 오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입니다. 이것이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다 할 때의 바로 그 ‘사랑’의 내용이고 실체입니다. 


내가 받은 사랑의 기억, 그래서 지금 여기 살아 있는 내가 ‘기억하는 사랑’,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내가 안길 그 ‘사랑’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시작이고 나중입니다. 또한 그 시작과 나중 그 사이를 그 받은 사랑, 경험한 사랑은 기억만으로 있지 않고, 앞으로 받을 더 크고 깊은 사랑에 대한 ‘기대’로 자라고, 그래서 ‘사랑의 기억’과 ‘사랑의 기대’를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3.       무슨 잘못을 했길래    


오늘 여기 바울의 변호를 듣고, 베스도 총독이 말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 

“나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나는 맑은 정신으로 참말을 하고 있습니다.” 

‘미쳤다’ 소리까지 듣는 바울 사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람들에게 무슨 일을 하였길래 미쳤다는 소리까지 듣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빌라도 총독의 관저로 예수님을 끌고 왔습니다. 총독이 그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당신들은 이 사람을 무슨 일로 고발하는 거요? 이 사람이 당신들에게 무슨 잘못을 하였소?” 

그리고 예수께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였소?”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관저 밖으로 끌고 나옵니다. 

“보시오, 이 사람이오.”

그러자 성난 군중이 소리칩니다. 

“없애 버리시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요한복음서 18:28-19:16)


Ecce Homo, Antonio Ciseri (1860-1880)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무슨 잘못을 하셨길래 사람들이 저 난리일까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소. 당신들이 이 사람을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소.” (요 19:4, 6)

예수님은 무죄입니다. 


“그 사람은 사형을 당하거나, 갇힐 만한 일을 한 것이 하나도 없소. 그 사람이 황제에게 상소하지 않았으면 석방될 수 있었을 것이오.” (행 26:31-32)

바울도 무죄입니다. 


4.       그럼 이것도 무죄일까?  


오늘 교회 밖에서든 교회 안에서든 교회를 향한 이렇다 저렇다 하는 그 수 많은 말들의 상당수는 칭찬의 말이 아닌, 비판과 걱정과 염려의 말인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스스로에게 한 번 솔직히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교회는 사람들에게 무슨 잘못을 했을까? 왜 사람들은 교회를 고발할까? 과연 누구의 잘못일까? 누구의 잘못으로 교회는 사람들로부터 그런 비판과 걱정과 염려를 사는 것일까?” 


“나는 그에게서 아무런 잘못을 찾지 못했소. 그 사람은 사형을 당하거나, 갇힐 만한 일을 한 것이 하나도 없소. 그 사람이 황제에게 상소하지 않았으면 석방될 수 있었을 것이오.”

예수께서, 그리고 바울이 무죄인 것처럼 오늘 교회도 무죄일까? 

혹시 무죄가 아니라면, 무슨 잘못이 있었을까? 




5.       기억으로만 있는 사랑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신 예수님께 어떤 사람이 묻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서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때에 너희는 ‘우리는 주인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님은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할 터이나, 주인은 말하기를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모두 내게서 물러가거라’  할 것이다. 너희는 바깥으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 것이다.” (눅 13:22-30)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그 곳에 내가 없다면, ‘나는 너를 모른다’ 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에 내가 없다면, 그래서 나에게 또한 그 사랑의 기억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된다면. 그건 상상조차 하기 싫은 지옥입니다. 

그러나, 여기 핵심은 ‘지옥은 있다 없다’ 하는 신학적 논쟁이 아니고, 그렇다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다’ 하는 협박성 말도 아닙니다. ‘예수 천국, 불신지옥’의 단순한 얘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 앞에서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길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의 생각과는 많이 다르시다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 (마 7:13-14)


그리고,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마 7:21-23)


주님께 중요한 것은, 주님과 내가 ‘겸상을 했고 안 했고’ 가 아니라, 주님께서 길에서 나를 ‘직접 가르치셨고 안 가르치셨고’ 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내가 ‘예언을 하고 못 하고’ 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내가 ‘귀신을 쫓아내고 못 쫓아내고’ 가 아니라, 또한 주님의 이름으로 내가 많은 ‘기적을 행하고 행하지 못하고’ 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니,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짐이 엄청났다.” (마 7:24-27) 


주님께 중요한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내가 ‘행하였느냐 행하지 않았느냐’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마 7:21-23) 


그렇다면 저들은 무슨 불법을 저질렀을까요?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주님으로부터 저런 모진 말을 듣는 것일까요? 

(22-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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