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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Nov 11. 2022

기억의 한 방식

사도행전, 그리고 교회다움 (22-2)


“아그립바 임금님, 나는 하늘로부터 받은 환상을 거역하지 않고, 먼저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음으로 온 유대 지방 사람들에게, 나아가서는 이방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고 전하였습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유대 사람들이 성전에서 나를 붙잡아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날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낮은 사람에게나 높은 사람에게나 이렇게 서서 증언하고 있는데, 예언자들과 모세가 장차 그렇게 되리라고 한 것밖에는 말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하셔야 한다는 것과,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부활하신 분이 되셔서,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 사람들에게 빛을 선포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19-23)


photo by noneunshinboo


1.       기억의 사람, 바울


“당신은 무슨 일을 하였소? 사람들에게 무슨 잘못을 하였길래, 사람들이 당신을 고발 하였소?”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을 듣고 총독이 말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


그러나 바울이 미친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은 ‘기억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기억을 기억으로만 남겨두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기억을 꺼내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와의 첫 만남의 아픈 기억, 회개의 가슴 절절한 기억, 그리고 주님과의 사랑의 그 뜨거운 기억을 매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2.       기억에만 있는 사람, 기억에만 머문 사랑이 아닌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합니다. 사람의 기억도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사랑의 기억’ 또한 오래 남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일생이 ‘한 여름 밤의 꿈’만 같아서, 너무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허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니다, 그게 아니다. 나는 너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너에게서 한 순간도 눈을 뗀 적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너는 ‘기억 안에 있는 너’가 아니라, ‘나의 영원함 속에 영원히 나와 함께 살아 있는 너’다. 나를 믿어라. 나를 믿고 함께 가자’ 하시며 그리스도 예수께서 바울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내 눈 앞에 나타나셨던 그 주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그리스도 예수. 그 주님을 바울은 매일 기억하고, 매일 가슴에 새기고, 또한 그 기억을 바울은 매일 나의 삶의 현장에서 나의 현실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도 그 주님을 삶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로 모이는 이유입니다. 성찬식/성찬례의 빵과 포도주는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주님에 대한 단순한 기억이 아닌 우리의 현실이 되고, 그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그리스도인들은 그 기억을 고스란히 담은 그릇이 되고, 빵과 포도주를 내 몸에 담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 나가, 그 기억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억은 교회 안에서 드리는 찬양과 경배로 끝나지 않습니다. 단지 이 천년 전 그때를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계신 부활의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기억으로, 기억이 아닌 현실로 여기 나의 곁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 예수를 그리스도인들은 나의 삶으로 살아갑니다. 


3.       회개의 기억은 사랑으로 깊어지고 


바울에게 있어 신앙의 길의 시작이며 또한 그 길을 계속 갈 수 있는 원동력은 ‘회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첫 만남, 그 사랑의 시작을 가능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회개였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당신을 드러내시기로 작정하셨을 때, 그래서 주님의 첫 일성(一聲)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마가복음서 1:15)


예수님과의 진정한 만남, 그리고 진실한 사랑은 회개에서 시작합니다. 다시 찾은 하나님, 다시 찾은 나의 집, 다시 찾은 사랑, 그 시작은 회개입니다. 그래서 나의 그 회개의 기억은 첫 만남의 그 두근거림, 그 처음 시작하는 사랑의 현기증을 다시 느끼게 합니다.  


“이런 나를 만나주시고, 이런 나를 받아 주시고, 이런 나를 사랑해 주신 주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 고백은 회개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회개는 계속 우리를 먹먹하게 하고 두근거리게 하고 어지럽게 하고 심장을 더욱 뛰게 하고, 또한 우리를 그 사랑 앞에 겸손하게 하며, 또한 더욱 사랑하게 합니다.  



“나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고 전하였습니다.”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요단 강에서 세례를 주던 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를 보고 말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어라.” (누가복음서 3:7-8)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에 마땅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무리가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요한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또 군인들도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 (눅 3:10-14) 




바울과 세례 요한만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여리고를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세관장이며 부자인 삭개오는 너무 보고 싶었지만 키가 작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것을 예수께서 보시고, 내려오라 하시고는 함께 삭개오의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예수가 또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합니다. 

“주님,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눅 19:1-10)


회개는 회개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회개의 기억으로만 있지도 않습니다. 실천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일, 회개에 마땅한 삶을 통해 회개는 기억이 아닌 살아가는 현실이 됩니다. 주님께 받은 죄의 용서, 그 사랑의 기억은 용서의 은총, 그 은총에 합당한 일, 그 사랑에 마땅한 삶이 그 뒤를 따라야 합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4.       살아남은 자의 몫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 기억은 살아남은 자가 앞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기억’ 그리고 ‘기억하는 사랑’이 언젠가는 나에게서 사라질 기억으로만 남지 않게 하는 것, 여기 내 안에 살아 있어 내가 함께 살아가는 사랑으로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 살아 있는 자에게 주어진 몫이고 살아낼 삶입니다. 그것이 살아 있는 자가 죽어 있는 자를 기억하는 한 방법이고, 죽어 있는 자를 살아 있게 하는 한 방법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기억의 종교인 기독교는 그러나 기억으로만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 그 값진 사랑의 기억을 오늘 여기 살아 있는 ‘기억 아닌 현실’로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현실로 내가 살 때 부활의 주님은 이 천 년 전 거기 제자들과 바울 사도에게만 나타나신 주님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 거듭 나타나시는, 그리고 함께 계시는 주님이 되십니다. 함께 살아가는 주님이 되십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는 그 사랑의 기억, 기억하는 사랑을 ‘어떻게 간직할까’가 고민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것이 고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 바울의 삶은 그 기억을 ‘어떻게 살까’ 하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우선은 먼저, 가던 길에서 내가 멈추고, 회개하여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의 기억에서 멈추지 않고, 그 회개에 합당한 일, 회개에 마땅한 삶을 내가 사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낮은 사람에게나 높은 사람에게나 구별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통해 하신 일을 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당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랑이 우리의 기억에만 머물지 않도록, 그 주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빛이 되고 사랑이 되어 주셨다는 그 기쁜 소식이 입과 귀에만 머물지 않도록, 나의 손과 발로, 나의 가슴으로, 그리고 나의 삶으로 나의 이웃 가운데서 살아내는 것입니다. 


5.       그리스도인이 기억하는 방식 


“당신은 무슨 일을 하였소? 이 사람들에게 무슨 잘못을 하였소? 이 사람들이 당신을 왜 고발하는 것이오?”


누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까요? 가슴에만 묻는 사랑이 아니라, 기억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래서 언젠가 더 이상 기억해 줄 사람이 남아 있지 않으면 이내 잊힐 사랑의 기억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살아 있는 사랑의 기억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까요? 그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죽음 그리고 부활의 그리스도 예수. 그 살아 계신 주님과 함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내가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러나 하지 말아야 할 일과 하면 안 되는 일은 하지 않는 것. 그래서 부활의 주님과 함께 이미 시작된 새 하늘, 새 땅의 하나님의 나라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뿐만 아니라, 여기 이 땅에서 그 새 나라를 내가 살아내는 것.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하는 한 방식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예수를 기억하는 한 방식, 그리고 그 부활을 여기 오늘 함께 사는 한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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