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그리고 교회다움 (23-1)
“많은 시일이 흘러서, 금식 기간이 이미 지났으므로, 벌써 항해하기에 위태로운 때가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충고하였다.‘여러분, 내가 보기에, 지금 항해를 하다가는 재난을 당할 것 같은데, 짐과 배의 손실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까지도 잃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다. 그리고 그 항구는 겨울을 나기에 적합하지 못한 곳이므로, 거의 모두는, 거기에서 출항하여, 할 수 있으면 뵈닉스로 가서 겨울을 나기로 뜻을 정하였다. 뵈닉스는 크레타 섬의 항구로, 서남쪽과 서북쪽을 바라보는 곳이다. 때마침 남풍이 순하게 불어오므로, 그들은 뜻을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닻을 올리고서, 크레타 해안에 바싹 붙어서 항해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서, 유라굴로라는 폭풍이 섬쪽에서 몰아쳤다. 배가 폭풍에 휘말려서, 바람을 맞서서 나아갈 수 없으므로, 우리는 체념하고, 떠밀려 가기 시작하였다.” (사도행전 27:9-15)
1. 로마로 가는 길
바울 사도는 지금 로마로 가는 길입니다.
가을에 들어선 지금 항해를 하기엔 위험하다, 생명까지 잃을지 모른다는 바울의 말보다 당연히 사람들은 괜찮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항해를 결정합니다. 때마침 상쾌하고 부드러운 남풍이 불어오니 이미 자기들의 뜻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자기들의 생각이 맞다고 여깁니다. 돛을 높이 올리고 항해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얼마를 가지 않아 폭풍이 몰아칩니다. 배는 폭풍에 휘말려서 어쩌지 못하고, 바람에 밀려 떠밀려 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온갖 수를 다 써 보지만 그냥 떠밀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 둘 사람들은 살아나리라는 희망을 접습니다.
우리의 삶, 그리고 신앙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처음은 나쁘지 않았는데, 순풍의 돛을 올린 듯 보이기도 했는데, 남들도 그게 맞다 부럽다 했고, 나 또한 어느정도 확신도 있었고. 기도도 많이 했고, 이 길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고, 또한 주님의 일이라고 믿었고, 그랬었는데. 그런데, 웬걸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옵니다. 이 방향이 분명 맞는데, 이 길인데, 뭐가 잘못된 것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유가 뭘까? 혹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의 반대 방향으로 내가 가고 있는 것일까?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믿음이 없는 것일까? 애초부터 이 길은 나에게 주어진 길이 아니고, 사실 나는 이 길을 가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은 아니었을까?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를 떠밀려 가며 이런저런 생각을 합니다.
여기 사도 바울의 인생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옛 어른들의 말씀대로 ‘참 어지간한’ 삶입니다. 높고 낮은 많은 산들을 넘어 깊은 계곡도 지나고, 넓은 모래 사막도 그리고 여기저기 작고 큰 물도 건너, 이젠 정말 마지막이다 하고 왔더니 그만 폭풍우 몰아치는 망망대해입니다.
로마로 가는 길. 바울이 황제가 되겠다 가는 길도 아니고, 총독 한 자리하겠다 가는 길도 아닙니다. ‘나 거기서 죽겠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며 가는 길입니다. 나 죽을 자리라는 것을 진즉 알고 내 손으로 내 죽을 자리 펴겠다 작심하고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러다가는 거기에 가기도 전에 죽을 판입니다. 제 아무리 바울 사도라 해도 이 정도면 이런 말 나오지 않았을까요?
“하나님, 정말 해도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제가 무슨 놀러가는 것도 아니고, 제 일 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가 무슨 대단한 것을 바라고 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저를 꼭 집어 가라고 하셔서 가는 길이고, 하나님께서 저더러 하라고 하시는 그 일 하러 가는 길인데. 모르긴 몰라도 이번엔 살아 돌아올 것 같지도 않은데. 그럼, 가는 길이라도 좀 편하게 가게 하시면 좋을 텐데. 어차피 죽으러 가는 길인데. 많이도 아니고 조금만 살펴 주셔도 감사할 텐데. 굳이 이렇게까지 하실 하등의 이유가 있으십니까? 이제 와서 이런 말씀드리긴 뭣하지만, 이번엔 조금 너무 하신 것 아니십니까?”
2. 그때 그 요나도 아니고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그리고 그 거센 바람에 이리저리 떠밀려가는 한 척의 배, 그리고 우왕좌왕 겁에 질리고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 바로 떠오르는 성경 속 두 장면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에 대고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요나는 주님의 낯을 피하여 스페인으로 도망가려고, 길을 떠나 욥바로 내려갔다. 마침 스페인으로 떠나는 배를 만나 뱃삯을 내고, 사람들과 함께 그 배를 탔다. 주님의 낯을 피하여 스페인으로 갈 셈이었다. 주님께서 바다 위로 큰 바람을 보내시니, 바다에 태풍이 일어나서,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었다. 뱃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저마다 저희 신들에게 부르짖고, 저희들이 탄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 안에 실은 짐을 바다에 내던졌다.” (요나서 1:1-5ㄱ)
바로 선지자 요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니느웨로 가라. 가서 사람들에게 전해라. ‘너희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 이르렀으니,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늦기 전에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런데 요나는 싫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분명 저 니느웨 사람들이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어 주십시오’, 그렇게 조금만 회개를 해도,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고, 또한 사랑이 한없는 분이시니, 분명 저들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실 것이라는 것을 요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요나는 그래서 싫습니다. 니느웨로 가는 게 너무 싫습니다. 죽어야 마땅할 사람들인데, 갈 수 없습니다. 거부합니다. 거기에 가서 ‘하나님은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니 회개해라’ 그렇게 말하는 게 정말 싫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니느웨와는 반대 방향인 스페인으로 가는 중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바다 위로 큰 바람을 보내시어 바다에 큰 태풍이 불게 만드십니다. 요나가 탄 배는 곧 부서질 판입니다.
지금 여기 바울의 사정은 어떨까요?
“이 사람이 황제에게 상소하지 않았으면, 석방될 수 있었을 것이오.”
그러나 바울은,
“아니오, 나는 황제에게 상소합니다. 로마로 보내 주십시오.”
하여 뱃길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배를 띄우기엔 위험한 계절이라고 하더라도 그렇지. 잘 불어온다 싶었던 순풍은 왜 금세 폭풍으로 변해버릴까요? 거센 파도와 태풍 속에 마치 폭우로 불어난 개울물에 떨어진 낙엽으로 왜 바울이 탄 배는 그냥 떠밀려 가고, 급한대로 바다에 닻을 내렸는데도 배는 도무지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일까요?
사람들은 점점 여기서 살아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잃어갑니다. 구원은 없어 보입니다. 끝으로 가고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 바울은 그때 거기 요나와는 많이 다릅니다. 요나처럼 주님의 얼굴을 피하기 위해 뱃길에 오른 바울이 아닙니다. ‘나는 가기 싫어요’가 아니라 ‘네, 가겠습니다’ 하며 황제가 살고 있는 ‘로마’로 바울은 지금 가고 있는 중입니다. 주님께서 가라는 곳에 가기 싫어서, 주님께서 하라 하신 일을 하기 싫어서 멀리 도망가는 길이 아닙니다. 외려 주님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고 주님을 더 빨리 만나기 위해 가는 길입니다. 주님께서 가라는 그 곳에 가서, 하라는 그 일을 하기 위해서 가는 뱃길입니다. 그런데, 왜 그때 거기 요나와 똑 같은 일을 지금 여기 바울이 당해야 하는 것일까요? 왜 바람은 거슬러서 불어오는 것일까요?
3. 그때 그 베드로도 아니고
두 번째 성경 속 장면은 이것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을 제외하고도 5천 명을 배불리 먹게 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 건너편으로 가게 하십니다. 홀로 남으신 예수께서는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탄 배는 물 한 가운데서 거슬러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거의 부서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때 풍랑 속으로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십니다.
“유령이다!”
“안심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제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합니다.
“주님,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오너라!”
예수께서 말씀하시니,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 예수께로 갔습니다.
그런데 얼마를 가지 못하고, 베드로는 불어오는 거센 바람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 그만 물에 빠집니다.
“주님, 살려주십시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붙잡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그리고 주님께서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그칩니다. (마태복음서 14:22-33)
그러나 지금 여기 바울은 그때 거기 베드로처럼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죄다 잡아 감옥에 가두겠다 했던 예전의 그 사울도 아닙니다. 물 위만 걷지 못할 뿐, 귀신도 쫓아내고 걷지 못하는 사람도 걷게 하고, 그의 옷깃에만 스쳐도 그 그림자에만 걸쳐도 아픈 곳을 씻은 듯 낫게 하는, 심지어는 졸다 떨어져 죽은 청년도 다시 살린, 그래서 바울을 신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께 ‘넌 믿음이 적다, 의심하지 말아라’ 혼이 나도 할 말이 없는 그런 형편없는 제자가 아닙니다. 스승을 잡으러 몰려온 군인들을 피해 ‘나 살겠다’ 제 스승 뒤에 혼자 남겨놓고 내빼던 그 오합지졸의 제자들 중 하나가 아닙니다.
‘나는 로마 황제에게 상소합니다’ 거침없이 로마를 향해 길을 가고 있는 바울입니다. 그런 바울에게 지금 이런 거친 비바람과 사나운 파도가 웬 말일까요?
요나, 베드로, 그리고 바울은 그렇다 치더라도, ‘폭풍우 속 바다 위를 손 놓은 채로 떠밀려 가는 조각배’의 삶을 살았던 그리고 살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왜 또 그럴까요?
갈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 쉽지 않고, 어디 가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말하는 것이 마치 ‘나는 외계인입니다’ 고백하는 것처럼 낯설고, 교회로 모이는 일이 무슨 ‘전 근대적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도 되는 양 신기하게 여기는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배우고 듣고 읽은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미안하고 송구하고 부끄럽고. 안 그래도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말처럼 되지는 않고, 생각처럼 쉽지 않고, 그래서 더 속상하고 힘들고.
겨우 마음 차리고 정신차려 조금 말씀대로 살라 치면 무슨 ‘철없는 아이’나 옛날 사람 취급이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불편하고 손해보는 것 같고, 귀찮기도 하고 또 눈치도 보이고. 그래서 ‘나 그리스도인 아닌데요’ 할 수도 없고. 남몰래 그리스도인 하는 것도 하루이고 이틀이지, 더는 그렇게는 할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될 것이고. 사실 믿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그렇다고 순풍에 돛 단 듯, 8차선 도로를 일사천리로 달리는 삶을 기대하진 않아도, 최소한 가다 서다 반복하며 그래도 어느 정도는 가는 맛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런데, 왜 나에겐 바람이 불었다 하면 역풍이고, 그것도 제대로 굵은 비를 동반한 태풍이요 광풍일까요? 내가 방향을 잘못 잡은 탓일까요? 그냥 바람이 부는 대로 따라 나도 불어가야 할까요?
(23-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