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회사이 Nov 18. 2022

부는 바람에도 씨앗은 뿌려지고

사도행전, 그리고 교회다움 (23-2)


“그러나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기운을 내십시오. 이 배만 잃을 뿐,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로 지난밤에, 나의 주님이시요 내가 섬기는 분이신 하나님의 천사가, 내 곁에 서서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반드시 황제 앞에 서야 한다. 보아라, 하나님께서는 너와 함께 타고 가는 모든 사람의 안전을 너에게 맡겨 주셨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어떤 섬으로 밀려가 닿게 될 것입니다.’ . . . 이렇게 해서, 모두 뭍으로 올라와 구원을 받게 되었다.” (사도행전 27:22-44)



1.       시편 73편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 나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구나. 그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했구나. 그것은, 내가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며, 몸은 멀쩡하고 윤기까지 흐른다. 사람들이 흔히들 당하는 그런 고통이 그들에게는 없으며, 사람들이 으레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아예 가까이 가지 않는다. 오만은 그들의 목걸이요, 폭력은 그들의 나들이옷이다. . . 입으로는 하늘을 비방하고, 혀로는 땅을 휩쓸고 다닌다. 하나님의 백성마저도 그들에게 홀려서, 물을 들이켜듯,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덩달아 말한다. "하나님인들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가장 높으신 분이라고 무엇이든 다 알 수가 있으랴?" 하고 말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가 악인인데도 신세가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구나.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 하나님, 주님께서는 온종일 나를 괴롭히셨으며, 아침마다 나를 벌하셨습니다.” (시편 73:1-14)


이 시편 73편의 시인의 질문도 이것입니다. 


“왜 나에게 바람은 항상 거슬러서 불어올까?”

“왜 사는 것이 이리도 폭폭한 것일까?”  

“나도 그럼 저들처럼 살아야 할까?” 


“차마 저들처럼 ‘하나님인들 어떻게 다 알 수 있을까? 아무리 가장 높으신 분이라고 해도 무엇이든 다 알 수가 있을까?’ 그렇게 대놓고 말은 못해도, 나 하나 정도는 저들처럼 살아도 되지 않을까? 그렇다고 아예 그렇게 살겠다는 것은 아니고, 조금만 아주 잠깐만 그렇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가만 보니 다들 그렇게들 살던데. 그렇게들 살아도 제법 살아지는 것 같던데. 아니 오히려 더 잘사는 사람들도 많아 보이던데. 지금까지 나만 너무 곧이곧대로 살려고, 말씀대로 살겠다고 용을 쓴 것은 아니었을까?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나는 너무 ‘모’나게 사는 것은 아닐까?”


2.       다시 로마로 가는 그 길 위에 서다 


“‘나도 그들처럼 살아야지’ 하고 말했다면, 나는 주님의 자녀들을 배신하는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 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내가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 . 아침이 되어서 일어나면 악몽이 다 사라져 없어지듯이, 주님, 주님께서 깨어나실 때에, 그들은 한낱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 . . .  그러나 나는 늘 주님과 함께 있으므로, 주님께서 내 오른손을 붙잡아 주십니다. 주님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해 주시고, 마침내 나를 주님의 영광에 참여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시편 73:15-24)


여기 시편의 시인도 우리처럼 ‘왜? 나에게’ 라는 그 질문을 끌어안은 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답은 없고, 눈은 붉어져 시려오고, 입은 마르고,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파오고, 손발도 저려오고, 그래 이 문제는 내가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무릎 억지로 세워 일어나, 집 밖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겨우겨우 주님께서 계신 성소, 하나님의 기도의 집에 들어섰습니다. 그 때, . . . ‘아, . . .’ 시인은 깨닫습니다. 


여기가 끝이 아니라는 것. 나의 끝도, 그리고 너의 끝도 여기가 아니라는 것. 여기 지금 세상의 끝은 있어도 하나님이 계신 세상의 끝은 없다는 것. 없는 그 끝에, 없는 그 시작에, 그리고 시작과 끝 그 사이에 하나님은 계시고, 그 하나님 안에 나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그 빛, 그 영광 속에 나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시인은 집 밖, 나의 밖으로 나와서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들어선 그때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주님!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그래서 내가 주님과 함께 있으니, 하늘로 가더라도, 내게 주님 밖에 누가 더 있겠습니까? 땅에서라도,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폭풍이 치는 바다에 있어도,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 복이니, 내가 주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고,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들을 전하겠습니다.” (참조, 시편 73:25-28)


바울은 지금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들을 전하러 로마로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폭풍우 속에도 그 폭풍우를 뚫고 들려오는 주님의 작은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기운을 내십시오. 이 배만 잃을 뿐,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로 지난밤에, 나의 주님이시요 내가 섬기는 분이신 하나님의 천사가, 내 곁에 서서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반드시 황제 앞에 서야 한다. 보아라, 하나님께서는 너와 함께 타고 가는 모든 사람의 안전을 너에게 맡겨 주셨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어떤 섬으로 밀려가 닿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27:22-26) 


바울은 하나님께서 태풍 그 한 가운데에도, 저 깊고 깊은 물 속에 숨은 물고기 뱃속에도, 거센 파도 위에 흔들리는 조각 배 안에도 그리고 그 배 밖에도, ‘나’와 그리고 ‘우리’와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모든 것들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바울은 또한 믿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불안에 떠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모두 뭍으로 올라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7:44)




3.       우리가 아는 한 가지 


우리는 저기 깊고 깊은 바다, 그 속 안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릅니다. 히브리인들은 바다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의 세력이라고 여겼습니다. 우리 역시 그 바다의 깊은 어둠을 잘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 불어오는 따뜻한 남풍이, 잔잔한 물결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릅니다. 지금 나를 향해 거슬러서 불어오는 이 바람이, 나를 집어삼킬 듯 높이 솟은 이 파도가 언제 끝날지 우린 모릅니다. 지금 부는 이 포근한 남풍이 정말은 내 신앙을 향한 역풍일 수 있고, 지금 나에게 거슬러서 불어오는 이 차가운 바람이 사실은 나의 삶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순풍일 수 있다는 것 역시 우린 모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의 처음과 나중을 모릅니다. 그 사이를 살아가는 우리이기에, 거기 사이에 서 있는 우리이기에 우리는 아는 것이 많이 적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요나도 알았고, 베드로도 알았고, 바울도 알았고,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면서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한 가지.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내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내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에게서 온다. 주님께서는, 네가 헛발을 디디지 않게 지켜 주신다. 너를 지키시느라 졸지도 않으신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주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주님은 네 오른쪽에 서서, 너를 보호하는 그늘이 되어 주시니, 낮의 햇빛도 너를 해치지 못하며, 밤의 달빛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 너를 모든 재난에서 지켜 주시며, 네 생명을 지켜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네가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이제부터 영원까지 지켜 주실 것이다.” (시편 121)


Van Gogh, the Sower, 1889


4.       깊고 깊은 바다, 씨 뿌리는 농부


바울은 씨 뿌리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씨를 뿌리러 지금 로마로 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모두는 씨를 뿌리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한 농부가 씨를 뿌립니다.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서두르지 않습니다. 휙 대충 던져 놓고 갈 수 없습니다. 해가 져도, 달이 떠도, 그리고 바람이 불어도 농부는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때로 바람은 거슬러서 불어옵니다. 내가 지금 가는 길, 그 길에 떨어져야 할 씨앗들이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뒤로 날립니다. 그렇다고 뒤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농부 눈 앞에 고랑과 이랑이 농부를 기다립니다. 계속 씨를 뿌리며 나아가야 합니다. 너무 늦으면 씨 뿌릴 시기를 놓치게 됩니다. 


바람에 뒤로 날려 어딘가 떨어진 그 씨앗들은 그러나 그냥 영영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도 비는 내리고 거기에도 태양은 비칠 것이고 거기에도 따뜻한 온기는 있을 것이고 거기 땅도 그 씨앗들을 받아 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거기서도 씨는 뿌리를 내릴 것이고, 또 자라 가지를 내고 잎을 내고 새들이 찾는 무성한 나무가 될 것입니다. 꽃도 필 것이고 열매도 맺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는 농부가 모르는 사이, 거슬러서 불어온 바람에도 불구하고 땅에 떨어져 자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삶도 그랬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왜 늘 바람은 나를 거슬러서 불어올까? 왜 나에게 순풍은 불어올 기미조차 없고, 죄다 역풍만 불어올까?” 


우리는 모릅니다. 나에게 우리에게 불어오는 지금 이 바람이 ‘순풍’일지 ‘역풍’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정말 하고 있다면,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다면, 그 하나님이 우리의 바람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니 분명 그 바람은 순풍일 것입니다. 역풍일리 없습니다. 이미 순풍에 돛을 단 인생입니다. 단지 갈 길이 멀기에 지금 당장에는 폭풍에 휩쓸려 그저 떠밀려 가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당장은 나에게 눈물과 아픔을 요구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 그리스도 예수께서 흘리신 그 눈물로 하나님 나라의 씨앗은 뿌려져 그리스도인으로 그리고 교회로 자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 서 있어 지금 흘리는 눈물은 해 뜨면 사라질 그냥 바닥에 쏟아진 물이 아닙니다. 믿음이고 소망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 (시편 126:5-6)


주님은 깊고 깊은 바다 위를 거침없이 우리가 항해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주의 사랑, 주의 빛이 어제처럼 오늘도 곧 비칠 것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주님의 사랑이 비칠 때를 기다립니다. 거슬러서 불어오는 바람에 너무 오래 손 놓지 않고, 거친 파도에 너무 깊이 겁먹지 않고, 기쁨으로 그 거두는 날을 소망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