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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Nov 24. 2022

그때로 돌아가면 달라질까?

사도행전, 그리고 교회다움 (24-1)


“우리가 로마에 들어갔을 때에, 바울은 그를 지키는 병사 한 사람과 함께 따로 지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 . 바울은 자기가 얻은 셋집에서 꼭 두 해 동안 지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그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가르쳤다.” (사도행전 28:16, 30-31) 



1.       나 돌아갈래 


‘교회다움’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왜 ‘사도행전’일까요?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우리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하곤 합니다. 


“만약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번엔 제대로 할 거야. 후회 없이 살 거야. 그때로 돌아가면 절대로 그 사람을 그렇게 떠나가게 놔두진 않을 거야. 그렇게 그만두진 않을 거야. 그때로 돌아가면 그때 그 실수, 그 잘못은 절대로 다신 반복하지 않을 거야 . . .” 

그렇게 우린 후회의 말과 다짐의 말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때로 돌아간다면 모든 것이 생각대로 잘 될까요? 그때와는 다르게 정말 잘 해낼까요? 수많은 경험과 지식과 깨달음이 있고 난 후의 오늘 지금 여기의 나로 그때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혹시 모를까. 그런 지식과 경험과 기억이 지워진 상태로, 그냥 그때 거기 그 모습 그대로의 나로 돌아간다면, 뭐가 달라질까요? 역시나 같은 행동을 나는 다시 반복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때가 그리고 그때의 내가, 지금과 그리고 지금의 나와 많이 다를까요? 달라질까요? 


2.       그때의 교회로 돌아갈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교회에 어떤 위기가 오거나, 새로운 신앙 부흥 운동을 시작한다 하면 더 자주 듣는 말입니다. 그런데, 궁금합니다. 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할까요? 그때로 돌아가면 뭔가 달라질까요? 돌아가기만 하면 될까요? 그때로 돌아가야만 교회는 부흥도 되고 우리의 신앙은 깊어지고 하는 걸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그때가 지금 우리가 돌아가고 싶을 만큼 그렇게 좋았을까요? 돌아가야 할 정도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겐 그때가 천국이었을까? 그때는 사실 박해가 심해도 너무 심했고, 그런 박해가 아니어도 귀족계급이 아닌 이상에 노예가 아니더라도 살기 쉽지 않은 때였는데. 왜 우리는 그리고 교회는 굳이 그때로 돌아가야 한다고 할까요? 


그때는 그럼 교회에 가는 것이, 교회로 모이는 것이,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일이 마냥 좋았고 즐거웠고 신났고, 그래서 흔히 말하듯 은혜롭기만 했을까요? 




3.       그때로 돌아가면 다 될까?


바울이 로마로 오기 바로 전 가이사랴에 감금되어 있을 때, 고발 건에 대한 심문을 하는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에게 자신을 변호합니다. 다 듣고나서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말합니다. 

“너는 짧은 말로 나를 설복시켜, 나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고 하는가!”

바울의 대답입니다.  

“짧거나 길거나 간에, 나는 임금님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내가 결박을 당한 것 외에는, 꼭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빕니다.” (사도행전 26:27-29)

바울이 처했던 상황이나, 바울이 헤쳐 나간 그 수많은 고난과 환난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바울의 말이 정말 솔직한 말이라는 것도 잘 압니다.   


“. . . 감옥살이도 많았고, 매도 많이 맞았고, 여러 번 죽을 뻔했었고. 유대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었고. 수많은 여행중에,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했고.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기도 했었고. 그 밖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매일매일 마음을 누르고 있고.” (고린도후서 11:23-28)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은 고통과 고난과 눈물로 가득한 – 물론 기쁨도 환희도 즐거움도 있었던 – 바울의 삶을 똑 같이 그대로 살자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저기 숨어 신앙을 지켜냈던 자유롭지 못했던 그때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신앙 생활을 하기를, 드러내 놓고 모이지 못했던 그때의 교회처럼 숨어 모이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그건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그런 고난과 박해만 뺀다면 그때 거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까요? 고난과 박해를 빼놓고 다 좋기만 좋았을까요? 




4.       정말 좋고 좋기만 했을까? 


“왜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느냐? 예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

제자들이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신 그 자리에서 꼼짝을 않고, 그 빈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진리의 영, 사랑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순절 그날, 거기,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약속하신 대로 오셨습니다. 


그 옛날 거기 바벨탑에서 사방으로 흩어졌던 언어들이 다시 ‘하나의 언어’, ‘진리의 언어’, ‘사랑의 언어’, ‘엄마의 언어’인 ‘성령의 언어’로 마침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라는 ‘하나의 언어’, 그리고 ‘하나의 이름’을 사용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그리스도 공동체,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제자들, 그리고 교회로 모인 사람들은 주님께서 맡기신 그 일을 했습니다. 바로 ‘뽑고 허물고, 심고 세우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부수고 허물고 파괴하고 뽑아버리고 잘라내는’ 일은 환영받는 일이 아닙니다. 

새 사람이 되어 옛 사람으로 살던 그때 시절, 그 옛 것, 옛 전통과 가르침, 그리고 옛 방식과 가치와 태도를 뽑고 허물고, 그래서 그 위에 새 씨앗을 심고 물 주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맞는 새로운 전통과 가르침을 세우고, 또한 새 사람이 되어 새 삶을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뽑고 허물고, 심고 세우는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고, 돕고, 나누는 일입니다. 당연히 환영받지 못하는, 그래서 당연히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조금씩 지금껏 ‘모르는 사이’, 혹은 ‘그냥 아는 사이’에서 벗어나, 성령의 인도와 도움 속에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는 사이’, 그리고 ‘잘 아는 사이’가 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사이’,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의 사랑을 받는 사이’의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가 되어갔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 베드로의 말을 받고, 세례도 또한 받은 신자의 수가 하루에 삼천 명이나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함께 모여 배우고 기도하고 또한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기적도 일어났습니다.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기도 했습니다. 자기의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었고, 성전에 열심히 모였고, 또한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겸손하고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었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지켜보며 칭찬했고 또한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행 2:38-47)

그렇다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은 지금 여기, 딱 그 시점의 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일까요? 


photo by noneunshinboo 


5.       그럴 리가요 . . . 


그러나, 사도행전의 교회는 꼭 그런 모습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시작된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온갖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교회의 안과 밖에서, 그리고 교회들 사이에서 시기와 질투와 갈등과 미움과 욕심과 이기(利己)와 구별과 차별의 문제들이 나타났습니다. 분란과 분열과 다툼과 싸움이 나타났습니다. 


“왜 주님의 영을 시험하려고 하였습니까? 도대체 왜 성령을 속이려고 하였습니까? 도대체, 왜, 어쩌려고 하나님을 속일 생각을 하였습니까?” (참조, 행 5:1-11)

오죽했으면 사도 베드로가 이런 말을 했을까요? 그렇게 교회 안에 서서히 다른 마음과 다른 생각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처음 사랑, 그 설레던 마음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조금 속여보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또한 외부로부터 박해와 핍박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다른 제자들도 감옥에 갇히고 매도 맞았습니다. 다시는 그런 이상한 말들을 퍼뜨리고 다니지 말아라, 다시 그러면 죽는다, 협박도 당했습니다. 다시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누구는 돌에 맞아 죽고 누구는 칼에 맞아 죽고, 그렇게 하나 둘 순교자들도 생겨났습니다. 


“난 갇혀도 좋다, 갇혀서 좋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갇힌 그러나 자유로운 사람이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아도 사실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세상의 중심이고, 그 중심에 우리가 있고, 그리고 지금 세상의 중심은 세상에서 가장 아픈 곳이니, 거기 ‘세상의 중심에서 주님의 사랑을 외치는’ 그래서 중심에 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그만 그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떼자, 대신 그리스도 예수를 잡자’, 세상을 향해 두려움 없이 외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리고 정말 그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뗀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죄다 잡아 감옥에 쳐 넣겠다, 씩씩거리며 다마스커스로 향하던 청년 사울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한 말씀에 지금껏 매달렸던 절벽에서 손을 뗀 사울은, 이방 나라를 향해 주님의 사랑을 외치는 주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6.       남 줘버려야 할 제 버릇 


사실 유대인 입장에서 이방인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사람들입니다. 가까이 가기엔 너무 불결하고 천한 사람들, 그렇다고 가까이 오라고 하기엔 영 마뜩잖고 께름칙한 사람들입니다. 초대교회의 큰 어른인 베드로 사도조차 강력하게 거부했던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야, 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라, 가서 함께 먹고 마셔라.”

“싫습니다. 주님, 절대로 전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속되고 부정한 것은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은 적도, 말을 섞은 적도 없습니다.”

“베드로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할 수 없이 베드로는 이방인인 로마 군대 지휘관, 고넬료를 찾아가 주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거기서 그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리시는 것을 보고 베드로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베드로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의 구원에는 어떤 구별도 차별도 없다는 것, 그 하나님의 은총은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사람들 적시는 ‘샘이 깊은 물로 흐르는’ 사랑이고, 모든 사람들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뿌리 깊은 나무에 이는 바람으로 불어오는’ 평화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유대인들은 그렇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유대 출신 그리스도인들도 그 점에서는 같았습니다. 


(24-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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