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그리고 교회다움 (24-2)
“우리가 로마에 들어갔을 때에, 바울은 그를 지키는 병사 한 사람과 함께 따로 지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 . 바울은 자기가 얻은 셋집에서 꼭 두 해 동안 지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그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가르쳤다.” (사도행전 28:16, 30-31)
1. 촛불을 끄는 바람
초대교회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걷는 길은, 그림자가 아닌 빛으로 살겠다, 하나님의 빛을 받아 그 빛을 다시 내며 살겠다며, 작은 촛불 켜고 걷는 좁고 험한 길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정말 위험은 사실 외부에서 불어오는 바람, 박해만이 아니었습니다. 내부에서 부는 바람이 촛불에는 더 큰 위협입니다. 켠 촛불을 정말 위협하는 바람은 내부에서 불어오는 불화와 분리와 차별의 바람, 분열과 파괴의 바람입니다. 그 바람은 당시 그리스도인들 안에, 그리고 교회 안에 있던 율법이고 전통이고 또한 기득권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은 엄연히 있다, 아니다, 그 모든 것을 메꾸고 허무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시다, 그런 구별과 차별은 이젠 없다, 아니다.”
교회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그리고 교회들 사이에서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높고 낮음, 안과 밖, 나와 너, 우리와 저들을 구별하는 잣대가 하나 둘 생겨났던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유대 출신, 그것도 성골이다, 진골이다. 너는 그것도 되지 못하는 이방 출신이다, 거리 출신이다, 변두리 출신이다. . .”
이런 저런 구별과 차별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는 같은 유대 출신 신자들 사이에도, 똑같이 나누어 주어야 할 구호 음식이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에게 쏠리고, 그래서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이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 6:1)
그러나,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소망도 하나였습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아버지시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에베소서 4:3-6)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왜 그런 편지를 썼을까요? 교회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여기서 저기서 유대 출신 신자들과 그리스 혹은 다른 이방 출신 신자들 사이에 다툼이 생기고, 분열이 생기고. 일등 크리스천과 이등 크리스천으로 구별 짓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2. 그리고 바람들
고린도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입니다.
“여러분에게 먹고 마실 집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고전 11:22)
교회로 모였는데, 성찬을 위해, 친교와 교제를 위해 준비한 음식들이 그 의미와 목적을 잃고, 가난하고 배고픈 신자들과 나누기는커녕, 어떤 사람은 여전히 배가 고프고,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해 있습니다. 그 꼴이 기막힌 바울도 오죽하면 이런 말까지 했을까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 음행이 있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일까지 있다고 하니, 그러한 음행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1)
그리고 또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소송할 일이 있을 경우에, 성도들 앞에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불의한 자들 앞에서 가서 재판을 받으려 한다고 하니, 그럴 수 있습니까? . . . 여러분 가운데는, 신자 사이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여 줄 만큼, 지혜로운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까? 그래서 신자가 신자와 맞서 소송을 할 뿐만 아니라, 그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 한다는 말입니까?” (고전 6:1, 5-6)
사도 바울에게도 기막힌 일이 일어났습니다.
“. . .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분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 여러분은 저마다 말하기를,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 ‘나는 베드로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기라도 했습니까? . . .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고전 1:11ㄴ-13)
고난과 박해 속 힘겹게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또 교회를 세우며 함께 힘든 시간, 그러나 은혜의 시간을 보냈었는데, . . . 어느 사이에 교회 안에서, 그리고 신자들 안에서 편을 가르기 시작하고, 줄을 세우기 시작하고, 파당을 짓고, 분열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떠날 때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투옥과 환난이고, 뒤에 남겨진 교회와 신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나운 이리들이라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루살렘으로 가야 합니다, 성령께서 가라 하시니 나는 가겠습니다.”
바울은 길을 떠나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지금 가시면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절대로 가시게 하지 말라고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길을 막습니다.
어떤 게 주님의 진정한 뜻일까요? ‘난 응답 받았다. 아니다, 내가 받은 응답이 하나님의 응답이다’, 이런 말 저런 말들이 교회 안에 넘쳐나고, 신자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습니다.
초대교회가 그렇게 오늘 우리가 생각한 것만큼, ‘나 돌아갈래’, 우리 ‘초대교회로 돌아갑시다’ 할 만 한가요?
3. 지금 여기가 초대교회
우리는 지금 여기서 이미 초대교회를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를 뿐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때 거기 초대교회의 좋고 또 나쁜 점들은 지금 여기 교회에 이미 다 있습니다. 특히 오늘 많은 교회들이 경험하는 문제들은 초대교회에서 드러난 것들과 크게 달라 보이진 않습니다. 굳이 그때로 돌아가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오늘 그것을 다시 반복하지 않으면 될 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좋았던 것들은 앞으로 더욱 좋게 하고, 나빴던 것들은 앞으로 절대 하지 않고 했었다면 다시 반복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시험받던 날에 반역한 것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라. 거기에서 그들은 나를 시험하여 보았고, 사십 년 동안이나 내가 하는 일들을 보았다. 그러므로 나는 그 세대에게 분노해서 말하였다. ‘그들은 언제나 마음이 미혹되어서 내 길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진노하여 맹세한 대로 그들은 결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여러분은 조심하십시오. ‘오늘’이라고 하는 그날그날, 서로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가졌던 확신을 끝까지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함께 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3:7-14)
오늘 지금 여기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오늘 지금 여기에서 그날그날을 서로 권면하며,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돕고 섬기며,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가졌던 확신을 끝까지 갖고 있으면서, 말씀을 지키고, 또한 주님의 사랑을 우리 서로에게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함께 누리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요? 멋진 교회가 되지 않을까요?
4. 지금 바울이 보고 있는 것
여기 마침내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 . . 자기가 얻은 셋집에서 꼭 두 해 동안 지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그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사도행전은 끝납니다. 무슨 이런 끝이 다 있을까 싶을 만큼 싱겁게 끝납니다. 그런데 누가는 왜 여기서 끝을 맺었을까요?
지금 바울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을까요? 바울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침대 위에 성서로 보이는 책이 있습니다. 바울의 무릎 위에도 성서로 보이는 책과 함께 아마도 적다가 멈춘 (옥중)편지도 보입니다. 한 손으로는 연필을 쥐고 있고, 다른 손은 입에 대고 있습니다. 마치 무엇을 보고 있는 듯,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듯, 그러나 주름과 흰 머리카락과는 다르게 두 눈은 또렷하고 초롱초롱합니다. 그리고 깊습니다. 그리고 등 뒤로는 창으로 들어온 빛이 마치 후광처럼 바울을 감싸고 있어 그 주변 벽의 어둠과는 대비됩니다.
그런데 여기 낯설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한 물체가 보입니다. 바로 침대에 기대어져 있는, 성서 필사본 혹은 편지를 묶은 꾸러미 옆에 놓인 긴 칼입니다. 가택 연금 상태인지, 감옥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죄수에게 저런 긴 칼이 허락될까요? 저렇게 늙고 힘도 없어 보이는 바울에게 저런 칼이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일까요?
그런데 왜 렘브란트는 굳이 저 긴 칼을 그것도 저렇게 드러나게 성서 묶음과 함께 나란히 배치를 했을까요? 한 손엔 성경, 다른 손엔 칼? 그런 것도 아닐 것이고. 도대체 왜 감옥에 갇힌 바울을 그리면서 칼 또한 그려 넣었을까요?
5. 긴 칼 옆에 차고
혹시 이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하나님 앞에는 아무 피조물도 숨겨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 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4:12-13)
말씀일까요? 우리를 살펴보시는 주님. 내 속에 숨은 생각, 감춘 마음, 몰래 품은 의도를 다 아시는 주님. 모든 것을 들켜 도망치고 싶고 숨고 싶고, 별 수 없이 벌거숭이인 채로 앞에 서서 고개를 떨구는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는 주님이 바로 저기 칼이고 말씀이 아닐까요?
그 칼이, 그 말씀이, 그 주님이 내 침대 위에, 내 무릎 위에, 내 손에, 그리고 내 눈에, 그리고 나와 함께 항상 계시니, 나는 감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베드로가 있던 거기만 살아 있는 말씀이, 그 성령께서 동행하시던 초대교회가 아니라, 지금 여기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초대교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가든 어디에 있든 여기 오늘을 그리고 여기 내가 있는 교회를 살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고, 잡고, 새기고, 또한 말씀과 함께 말씀의 사람들과 함께 살면 됩니다.
저기 초대교회의 신앙의 거인 바울. 노년이지만 청춘의 눈을 하고 있는 바울의 그 두 눈은 말씀을 붙잡은 눈입니다. 바울은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났고, 그 말씀이신 주님을 절대 놓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이신 주님을 전하고 가르치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약성서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의 상당 부분을 또한 쓰기도 한 바울은 말씀의 사람입니다.
지금 노년의 바울은 살아 계신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안에 바울은 지금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 지금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바울은 있습니다. 바울의 삶은 말씀으로 살아온 삶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바울의 피와 살이 되어 바울은 그 말씀을 살아냈고, 그래서 말씀은 바울의 삶이 되었고, 그래서 바울이 삶으로 써 내려간 교회에 보낸 편지들은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고 교회가 손에 들고 있는 생명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영원한 생명을 향한 바울의 선교 여정. 지금 렘브란트가 그린 감옥의 바울 손에 들려 있는 다 쓰지 못한 편지처럼, 누가 역시 그 끝을 쓰지 못한 사도행전입니다. 그때 초대교회가 썼고, 이어서 그 다음 세대의 교회가 썼고, 또 이어서 그 다음 세대의 교회 또 그 다음 세대의 교회가 쓰고 썼던 그러나 끝을 쓰지 못한 사도행전은 끝나지 않은 채로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교회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굳이 초대교회로 돌아갈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 우리가 써 내려가면 됩니다. 쓰다 다 쓰지 못하면 다음 세대가 또 이어서 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초대교회를 살아가면, 사도행전을 써 내려가면, 우리도 언젠가 그 때가 되면, 지금 저기 바울이 보고 있는 것을 우리도 함께 보고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