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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Apr 05. 2023

욥에게 화가 난 이유

하나님과 함께 어둠 속을 걷는 법 5-1

사순절에 함께 읽는 욥기


1.        

“가난한 사람들이 도와 달라고 할 때에, 나는 거절한 일이 없다. 앞길이 막막한 과부를 못 본 체한 일도 없다. 나는 배부르게 먹으면서 고아를 굶긴 일도 없다. 일찍부터 나는 고아를 내 아이처럼 길렀으며, 철이 나서는 줄곧 과부들을 돌보았다. 너무나도 가난하여 옷도 걸치지 못하고 죽어 가는 사람이나, 덮고 잘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을 볼 때마다, 내가 기른 양 털을 깎아서, 그것으로 옷을 만들어 그들에게 입혔다. 시린 허리를 따뜻하게 해주었더니, 그들이 나를 진심으로 축복하곤 하였다. . . 나는 황금을 믿지도 않고, 정금을 의지하지도 않았다. 내가 재산이 많다고 하여 자랑하지도 않고, 벌어들인 것이 많다고 하여 기뻐하지도 않았다.” (31:16-25)


그리고 나는, 


“내 원수가 고통받는 것을 보고, 나는 기뻐한 적이 없다. 원수가 재난을 당할 때에도, 나는 기뻐하지 않았다. 나는 결코 원수들이 죽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여 죄를 범한 적이 없다. 내 집에서 일하는 사람은 모두, 내가 언제나 나그네를 기꺼이 영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나그네가 길거리에서 잠자도록 내버려 둔 적이 없으며, 길손에게 내 집 문을 기꺼이 열어 주지 않은 적도 없다. . .” (31:29-34)


욥은 의로운 사람이다,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빈 말씀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돕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욥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습니다. 하소연할 곳을 찾았습니다. 욥의 말을 들어줄 사람을 찾았습니다. 


Job and His False Comforters, Jean Fouquet


“내가 한 이 변명을 들어줄 사람이 없을까? 맹세코 나는 사실대로만 말하였다. 이제는, 전능하신 분께서 말씀하시는 대답을 듣고 싶다.” (31:35)


그러나 대답이 없으십니다. 내 죄가 무엇인지나 알았으면 좋겠는데. . . 


“내 원수가 나를 고발하면서, 뭐라고 말하였지? 내가 저지른 죄과를 기록한 소송장이라도 있어서, 내가 읽어 볼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어깨에 메고 다니고, 그것을 왕관처럼 머리에 얹고 다니겠다.” (31:36)


이제 욥에게 남은 길은 하나입니다. 


“나는, 내가 한 모든 일을 그분께 낱낱이 말씀드리고 나서, 그분 앞에 떳떳이 서겠다.” (31:37)


그리고 

“. . . 이것으로 욥의 말이 모두 끝났다.” (31:40ㄴ) 


욥의 최후 변론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욥도 세 친구들도 비로소 모두 입을 닫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차례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난데없이 엘리후라는 사람이 무대 위로 뛰어오릅니다. 일종의 난입입니다. 무척 화가 나 있습니다. 욥에게도, 세 친구들에게도 화가 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그렇게 화가 나 있을까요? 


“욥이 이렇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잘못을 하나님께 돌리므로, 옆에 서서 듣기만 하던 엘리후라는 사람은, 듣다 못하여 분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엘리후는 람 족속에 속하는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이다. 엘리후는 또 욥의 세 친구에게도 화를 냈다. 그 세 친구는 욥을 정죄하려고만 했지, 욥이 하는 말에 변변한 대답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32:2-3)


그런데 엘리후는 정말 누구에게 화가 난 것일까요? 욥과 친구들에게 화가 났을까요? 혹시 속 시원히 하나님께 따지고 드는 욥이 부러워 그런 것이 아닐까요? 정말은 욥과 함께 속 후련하게 하나님께 따지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은 아닐까요? 사실은 욥처럼 하나님께 말 한마디 못하는 욥의 친구들에게 화가 난 것은 아닐까요? 

엘리후 자신이 여태껏 알고 믿고 살았던 하나님의 그 인과응보의 원칙이 깨진 듯 보여, 지금까지 지켜왔던 신념이 깨진 듯 보여, 도무지 지금 이 현실이 믿을 수 없어, 그래서 정말은 하나님께 화가 난 것은 아닐까요? 엘리후 역시 지금 사는 세상이 그리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사실은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그런 세상에 화가 난 것은 아닐까요? 지금 그걸 애써 모른척하는 것은 아닐까요? 


The Wounded Angel, Hugo Simberg, 1903


“지금 하나님께서 눈을 감으신 채로 세상을 운영하시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의 들것에 실려가는 저 상처입은 천사, 앞을 못 보는 천사를 통해 세상을 운영하시는 것은 아닐까? 정말 눈을 감은 세상, 상처입은 세상에 내가 사는 것은 아닐까?”


지금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요? 그게 들킬까 싶어 일부러 저렇게 화를 내는 것은 아닐까요?




2.        

<When Bad Things Happened to a Good Person>이란 책으로 유명한 유대교 랍비, 해롤드 쿠슈너(Harold S. Kushner)가 욥기 해설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안정된 그리고 질서 정연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어 한다. 우리가 잠자리에 들 때 책상 위에 올려 놓았던 물건이 아침에 어디로 사라지지 않고 아침에 거기 있어야 한다. 우리는 매일 아침 동쪽에서 뜨는 해와 겨울보다 따뜻한 여름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패턴을 찾으려고 한다. 열심히 그 패턴을 찾는다면, 우리는 예를 들면 운전 중에 문자를 주고받는 것은 사고로 이어지는 그 연관성을 알게 되거나, 아니면 라스베가스와 행운을 주는 셔츠의 무관성을 알게 된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불공정/불공평(unfairness)하지 않다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 비로소 안심하고 살 수 있습니다. 

“그래 저 사람은 그런 복을 받을 만해. 그래, 저 사람은 그런 벌을 받아도 사실 할 말은 없지. . .” 

욥의 세 친구들도, 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찾아낸 그런 패턴과 이해의 틀과 원칙과 규칙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게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그 이유를 전부 다 설명할 수 있을까요?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의 그 이유를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을까요? 




3.        

<뷰티풀 마인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존 내쉬라는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천재 수학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숫자를 믿었습니다. 숫자로 세상을 보았고, 분석했고, 이해했고, 그리고 숫자로 세상에서 일어난 일들을 설명할 수 있고 또한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방정식과 논리의 세계, 이성의 세계에 있었습니다. 그 영화에서 인상적인 한 장면입니다. 


대학교 벤치에 앉아 있던 존 내쉬는 눈 앞에 비둘기들이 내려앉았다가 다시 하늘로 날아올라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한 동안 그렇게 있던 존 내쉬는 기숙사인지 강의실인지로 뛰어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곧장 창문에 무언가 숫자와 기호로 이루어진 방정식을 써 내려갑니다. 


바로 비둘기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그 패턴을 숫자로, 방정식으로 정리하는 것입니다. 비둘기들이 어떻게 모여, 어떻게 흩어져 날아가는지, 그 패턴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학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서는 궁금합니다. 그게 가능할까? 어떤 일어난 현상들 속에서 패턴을 찾아내고, 수치화하고 등식화하고, 그래서 그것을 통해 그 일어난 일들을 설명하고, 나아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측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일까? 


photo by noneunshinboo 


여기 욥과 친구들이 지금 씨름하고 있는 ‘인과응보’의 정의 역시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하나의 패턴, 이해의 틀일 수 있습니다. 하나의 등식입니다. 방정식입니다. 착한 일을 하면 상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벌을 받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흠 없이 정직하게, 악을 멀리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하나님을 멸시하고, 악을 가까이하고,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고. 방정식입니다. 패턴입니다. 


그런데, 지금 욥에게 그 방정식이 맞질 않습니다. 틀렸습니다. 그 원칙이 깨졌습니다. 그 패턴으로는 설명이 되질 않습니다. 신념이 흔들립니다. 믿음이 흔들립니다. 삶이 흔들립니다.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일들, 내 눈 앞에서 지금 벌어진 일들을 전혀 설명하지 못하니, 당연히 내일을 예상할 수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 내 발을 디뎌야 할지 말아야 할지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앞에 어떤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앞으로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도무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답답합니다. 불안합니다. 무섭습니다. 두렵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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