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 어둠 속을 걷는 법 4-3
사순절에 함께 읽는 욥기
1.
하나님 눈 밖에 난 자식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벌을 받아 싼 자식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죽어 마땅한 자식도 없습니다. 그런 자식은 없습니다. 자식을 그렇게 생각하는 부모도 없습니다. 다짜고짜 자식을 끌어다가 무릎을 꿇리고 눈을 부라리며,
“네가 네 죄를 알렸다.”
자식에게 그렇게 말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내가 그렇습니다,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벌을 받아도 쌉니다.”
자기 자신을 그렇게 책망하는 자식은 있습니다. 눈물로 고백하는 자식, 용서를 비는 자식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자식을 찾으십니다. 찾고 찾아 안으십니다. 기다리고 기다리십니다. 기다리다 찾아온 자식 당신 품에 꼬옥 안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릴 지언정,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 그리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어머니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소중히 여기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대하십니다. 그것이 귀한 당신의 외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이유입니다.
2.
여기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길을 걷던 날을 기억합니다. 메시아가 오셨다, 여기 메시아가 계시다, 그래서 가족도 친구도 포기하고, 하던 일도 그만두고, 그 메시아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그 날을 기억합니다. 세상이 온통 장미빛이었습니다. 세상이 다 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서로를 축하하며 걷던 길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거기서 그 메시아가 십자가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은 것을 보았습니다. 무덤에 묻힌 것도 보았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흘을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들키면 그 옆에 나도 죽어 묻힐까 싶어 꼭꼭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사흘 뒤에 몇몇 여자가 거기 무덤을 찾았다가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천사를 보았습니다. 그 메시아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살아나신 메시아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게 끝입니다. 절망입니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엠마오로 되돌아 가고 있습니다. 어둠입니다. 절망입니다.
이제 희망은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 걷다 보니 어느새 동행이 생겼습니다. 웬 남자가 함께 걷습니다. 그 남자가 묻습니다.
“당신들이 걸으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 말들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그 낯선 사람에게 말합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으면서, 이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당신 혼자만 모른단 말입니까?”
다시 그 남자가 묻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그래서 그 있던 일들을 얘기합니다. 희망 속에 걸었던 길을 이제 절망 속에 걷고 있는 그 자초지종을 얘기합니다. 다 듣고 그 남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 . .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써 놓은 일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셨다. 그 두 길손은 자기들이 가려고 하는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더 멀리 가는 척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를 만류하여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묵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앉으셨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한순간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눅 24:25-32)
그리고 그 두 사람은 곧장 다시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납니다.
절망의 길이 다시 희망의 길이 되었습니다.
3.
여기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 그 길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었고 내일도 있습니다. 같은 길입니다. 어제는 희망의 길이었고, 오늘은 절망의 길입니다. 그러나 내일은 다시 희망의 길이 됩니다.
‘메시아가 있다, 메시아를 만나러 간다, 메시아를 내가 지금 따라 가고 있다, 그래서 희망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가 없다, 그 메시아가 죽었다, 그 메시아가 나를 버렸다, 그러니 나도 그 메시아를 버린다, 희망은 없다, 절망이다’, 그래서 그 길은 절망의 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죽었다 여겼던, 죽었다 했던, 나를 버렸다 했던, 나를 잊었다 했던, 그래서 나도 버렸다 잊었다 했던, 그래서 이제 절망이다 했던 그 메시아가 부활하셨다, 죽음을 이기셨다, 절망을 이기셨다, 그 메시아는 어디 가지 않으셨다’, 그래서 이제 참 희망의 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 아들 그리스도를 버리지 않으셨다, 그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나를 기억하셨다, 잊지 않으셨다, 그리고 절망 속에 있는 나와 함께 줄곧 걷고 계셨다, 그런데 희망이 내 옆에 있는 지도 모르고 나는 절망을 걸었다, 그런데, 희망은 나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주님은 나와 함께 계셨다’, 그걸 알았더니, 그걸 깨달았더니, 절망의 길이 다시 희망의 길이 되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 .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요한복음서 14:1-6)
지혜를 찾는 길, 지혜를 얻는 길, 지혜로 향한 길, 그 지혜의 길은 내가 가야 할 거기, 장소가 아니라, 여기 내가 주님과 함께 걷는 길입니다. 어느 순간 와 보니 지혜에 도달했다가 아닙니다. 도착해서 지혜를 찾았다, 얻었다가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걷는 길, 그것이 지혜의 길입니다. 그 길이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바로 지혜이십니다. 지혜이신 주님과 함께 걷는 것이 지혜를 찾는 길이고, 지혜를 얻는 길이고, 지혜로 향한 길이고, 지혜의 길입니다.
4.
지혜의 길, 그것은 내가 그 하나님을 알아가는 길입니다. ‘알아서 가는’ 길이 아닌, ‘알아가는’ 길입니다. 그 길을 가는 중에 그 이유 있는 고통도 고난도 있을 것이고, 그 이유 없는 고통도 고난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쁜 일도, 즐거운 일도, 너무 행복한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천국 같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끝이 아닙니다. 절망의 때이든, 행복에 겨운 때이든, 아직은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주님의 모든 계획을 우리는 모릅니다. 오직 그분만 아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 길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주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니,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지혜는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 사는 길입니다.
“우스라는 곳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 (욥 1:1)
그 욥이 지금 갓길에 앉아 있습니다. 잠시 멈추었습니다. 길을 잘못 들었는지, 아니면 이 길을 계속 가야 할지 그 고민에 고통스럽습니다. 연극의 2막이 끝났습니다. 3막이 시작되기 전입니다. 막간입니다. 곧 결정해야 합니다, 계속 갈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그만둘 것인가. 관객으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든, 아니면 예전 살던 옛집 거기로 가든. 절망 속에 엠마오로 가던 길로 계속 가든, 다시 가던 길을 돌려 희망 속에 예루살렘으로 가든, 결정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요, 악을 멀리하는 것이 슬기다.” (욥 28:28)
그런데,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 계속해서 나와 함께 희망을 걷겠느냐? 아니면 여기 그만 멈추겠느냐? 그래서 너 혼자 계속 절망을 걷겠느냐?”
“어떻게 하겠느냐? 네 친구가, 네 이웃이 고통 속에 절망을 혼자 걷게 하겠느냐? 아니면 그 친구에게, 그 이웃에게 네가 희망이 되어, 너의 주님인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희망을 걷겠느냐?”
우리가 주님께 답할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