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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May 04. 2023

저 하늘의 나는 새를 보라

마태복음서, 길 위에서 길을 가르치는 예수 (11-1)

함께 읽고 걷는 더 드라마, 예수의 길 떠난 가족


1.        

우리는 무엇을, 어디를, 그리고 누구를 보며 살고 있을까요? 


“저 하늘의 나는 새를 보라, 저 들에 핀 꽃을 보라.” 


조금 뜬금이 없는 말씀입니다. 지금 코 앞에 닥친 문제들로 이리저리 치여 사는 일상인데. 하늘의 나는 새를 보고, 들에 핀 꽃을 보라는 말씀은 조금은 속 편한 말씀, 한가한 말씀처럼 느껴집니다. 


photo by noenunshinboo 


2천년대 초반 즈음에 보았던 한 광고 문구가 머릿속에 여전히 있습니다. 그 어떤 광고보다 날 것 그대로의 현실을 반영합니다. 또한 그런 현실을 부추기고 또 만들어 갑니다. 아프고 슬프고 나아가 조금은 섬찟한 광고 문구입니다. 지금 우리의 사는 모습과 생각을 저렇게 대놓고 말할까, 우리의 욕망을 저렇게 잘 표현할까, 우리의 속내를 저렇게 노골적으로 보여줄까. 그런데 이러다 정말 우리는 저 광고 문구대로 믿고 또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정말 저 광고 문구가 말하는 그 길로 우리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당신이 지금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패러디를 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탄 차가 당신을 말해준다. 당신이 입고 있는 옷, 걸치고 있는 악세서리가 당신을 말해준다. 당신의 사회적 지위와 그 자리가 당신을 말해준다. 당신이 지금 앉아 먹고 있는 거기, 그리고 그 음식이 당신을 말해준다. 당신이 여행하는 그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 그리고 당신이 머물고 있는 그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 . .  

그런데, 지금 이렇게 말을 하는 그 화자,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은 그렇다면 어떤 사람일까요? 


저 사람이 지금 살고, 머무는 그 곳을 보는 나, 저 사람이 소유한 그것을 보는 나. 그 나를 말해주는 것은 바로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 즉 저 사람 안에서 그리고 저 사람을 통해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즉, 나의 욕망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은 그냥 나의 욕망이 투사된 한 물체일 뿐입니다. 한 인격체가 아닌 일종의 마네킹입니다. 저 사람의 소유, 재산, 직업, 사회적 위치를 내가 지금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그 사람, 그 곳, 그리고 그 것이 나를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삶의 지향, 삶의 목표, 삶의 의미는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나의 눈 앞에, 나의 옆에 있는 누군가를 그 사람이 갖고 있고, 살고 있고, 하고 있는 그것으로 판단한다면, 그 사람의 존재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들고 있고, 입고 있고, 살고 있고, 하고 있는 그것들을 보고 또 그것들로 그 사람을 판단한다면. 그리고 나 역시 그런 판단에 나를 맡긴다면. 그건 우리 모두에게 참 초라하고 슬프고 끔찍한 일입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한다. 그렇다면 성경 속 그 욥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동방에서 가장 부자였던 욥, 그러나 하루 아침에 지나가는 개도 쳐다보지 않는 처지가 된 욥. 이전이나 이후나 욥은 욥일 뿐인데. 이제 그 사는 곳이 달라졌고, 그 갖고 있는 것이 달라졌고, 또한 그 사는 마을에서의 처지도 달라졌고. 그래서 사람들의 그리고 친구들의 시선이 달라졌다면. 여기 아파트 광고에 따라 욥을 그래서 사람들은 죄인으로 생각했을까요? 그렇다면 그게 욥에겐 더 큰 고통이고 아픔이고 슬픔이 아니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욥을 있는 그대로의 욥으로 보셨고, 그래서 여전히 하나님 눈에 욥은 의롭고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사람, 의인이었습니다. 

결국 내가 무엇을 보느냐가 나를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그것을 따라서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면 어떨까요? 


photo by noneunshinboo 


2.        

세례 요한이 제자 두 사람과 서 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서 세례 요한이 말합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그러자 그 두 제자가 요한이 하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 두 사람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물으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그러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와서 보아라.” 

그리고 요한복음서에는 그 둘이 예수님을 따라가서, 예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을 그와 함께 지냈다, 고 전합니다. (요한복음서 1:35-39)


세례 요한의 두 제자는 무엇을 기대하고 그 예수님을 따라갔을까요? 주님이 어디에 머무르시는지 왜 물었을까요? 예수께서 사시는 곳을 보고, 그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랬을까요? 그렇다면 그 둘은 예수께서 계신 곳을 보았고, 거기 같이 있었으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았을까요? 세례 요한이 말한, ‘하나님의 어린 양’의 의미를 알았을까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와 형제간인 안드레였다. 이 사람은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말하였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 그런 다음에 시몬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요 1:40-42)


그렇다면 여기 안드레는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알았을까요? 예수께서 사시는 곳이 남달랐을까요? 무엇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이게 했을까요? 메시아로 알게 했을까요? 


“율법학자 한 사람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마 8:19-20)


마땅히 머물 곳이 없다, 의지할 곳도 사람도 없다 하시는데.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예수님이 메시아인 줄 알까요? 무엇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알 수 있을까요? 




“다음 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떠나려고 하셨다. 그 때에 빌립을 만나서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 . .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서 말하였다.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나다나엘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빌립이 그에게 말하였다. ‘와서 보시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두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나다나엘이 예수께 물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나다나엘이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다고 해서 믿느냐?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네가 볼 것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요 1:43-51)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을까?”

예수가 사는 곳을 보니 메시아가 나올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메시아일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다나엘을 보신 예수님은 대뜸 그를 알아보십니다.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아니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나다나엘,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나다나엘을 보셨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곳을 또한 주님께서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주님이 사시는 거기 나사렛을 보았고, 그리고 주님을 판단했습니다. 주님이 바라보시는 곳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주님을 몰랐고, 주님은 그런 나다나엘을 아셨습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3.        

대학 입학을 위해서 혹은 취업을 위해 자기 소개서를 씁니다. 한참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자기소개서를 쓰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여기 자기 소개서의 이 사람, 지금 이 ‘나’는 누구일까? 정말 ‘나’일까? 자기 소개서 속 그 ‘나’가 너무 낯설게 느껴집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소개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 나를 소개하는 것일까? 아니면 나도 모르는 누구를 나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있는 것, 나의 사는 것, 나의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보는 누군가의 시선으로 내가 나를 보고 있습니다. 그 누군가의 시선에 나를 끼워 맞추고 있는 나는 그래서 슬픕니다. 자기 소개서 안의 그 나, 그리고 그 소개서 밖의 나. 두 개의 나입니다. 자기 소개서 속 나는 분명 나와 닮았지만 그러나 정말 나가 아닙니다. 거울 속에 비친 사람이 나가 아닙니다. 무서워집니다. 나는 어디를, 무엇을, 누구를 보고 있는 나일까? 

나에게 조차 나를 소개하지 못하는 나가 되어버린다면 그건 비극일 것입니다. 남의 시선을 따라 나를 보았다가 진짜 보물을 잃기 쉽습니다. 마음을 잃기 쉽습니다. 정말 소중한 것을 잃기 쉽습니다. 


(→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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