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서, 길 위에서 길을 가르치는 예수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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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다가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며,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간다.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는 일이 없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 가지도 못한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마 6:19-21)
지금 나의 보물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습니다. 진리입니다. 나의 소중한 것이 있는 거기에 당연히 나의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물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님의 질문은 사실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너에게 중요한 것, 그 보물은 무엇이냐?”
물론 여기서 말하는 보물을 돈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보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보물은 그것을 포함해서, 남들의 시선을 받게 만드는 것, 즉 내가 주위로부터 듣고 얻고 받는 칭찬과 찬사, 박수 갈채, 인기, 존경, 그리고 명예입니다.
나를 높여주고 나를 돋보이게 만들고, 내가 높이 세워주는 그 모든 것들입니다. 나를 사람들 속에서 잘 드러내 주는 것, 나를 잘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분명 돈이 가장 효과적이고 유용한 수단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도 나를 돋보이게 하는 것들입니다. 나와 하나님 그 관계에 해를 주는 것들입니다. 나에게 주님께로 가는 그 길목을 막고, 또한 걸림돌이 되는 것들입니다.
서둘러 주님께로 가야 하는데, 이 길을 걷고 뛰고 해야 하는데. 양 옆에 늘어선 사람들이 나에게 박수와 환호와 갈채를 보냅니다. 내가 신고 있고 입고 있고 먹고 있는 것, 또 내가 쉬고 눕고 머무는 곳을 보며 나를 치켜세우고 높여 세우며 알아주고, 이젠 더 나아가 사인도 해달라, 사진도 한 장 찍자, 이것 마시고 뛰어라, 이것 먹고 달려라, 내 것도 들고 사진 찍자 . . . 도무지 길을 비켜줄 생각을 않습니다.
신앙은 장거리 경주입니다. 신앙은 ‘땅’ 신호에 거침없이 뛰어나가,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면 끝나는 단거리 100미터 200미터 경주가 아닙니다. 42.195 킬로미터를 달리는 마라톤입니다. 달리다 보면 내 주변의 사람들도, 사물들도, 나무와 꽃들도 보입니다. 방송 중계차도 보이고 카메라도 보이고 저 멀리 헬리콥터와 드론도 보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눈에 들어올 수 밖에 없습니다.
주말 오후를 즐기는 사람들의 얼굴이 스치고, 데이트 나온 연인의 웃음도 보이고, 왜 저런 힘든 경기를 할까, 측은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도 있을 것입니다. 박수도 환호도 있습니다. 거기엔 거짓 박수, 마지못해 지르는 환호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장거리 선수, 마라토너는 무엇을 보며 뛰어야 할까요? 우리 신앙인은 무엇을 보며 신앙의 길을 걸을까요?
2.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그런 생각을 끊어 버릴 슬기를 가져라. 한순간에 없어질 재물을 주목하지 말아라. 재물은 날개를 달고, 독수리처럼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 (잠언 23:4-5)
한순간에 없어질 것들을 바라보지 말아라.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날개가 돋아, 하늘로 날아가는 독수리처럼 금새 사라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들을 그만 보아라, 그만 눈여겨 보아라 하는 것입니다.
욥이 갖고 있던 것들, 욥이 누리고 살던 것들만 바라보던 사람들은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말자 욥을 떠났습니다. 욥이 죄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욥이 갖고 있고 누리고 있던 것들을 보았고, 그래서 욥을 의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하루아침에 날개가 돋아 허공으로 사라졌으니, 그건 분명 욥이 의인이 아니라는 증거다. 우리가 욥을 여태껏 잘못 보았다. 그렇게 사람들은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욥이라는 그 사람의 그 재산과 자식을 포함한 그 모든 보물들이 그 욥을 말한다고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그 사람들에 의해 졸지에 죄인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이 의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그런 생각을 끊어 버릴 슬기를 가져라. 한순간에 없어질 재물을 주목하지 말아라. 재물은 날개를 달고, 독수리처럼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 (잠언 23:4-5)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덧없는 것이다, 허무하고 허무하다, 집착을 버려라, 모든 욕망을 버려라, 지금 내게 있는 것이 너무 적어 힘겹고, 지금 내게 있는 것이 없어질까 두렵고, 지금 내게 무엇이 없는 것이 괴롭고, 그 없는 것이 여전히 내게 없어 불안하고. 그러니 집착을 버려라, 모든 욕망을 끊어라, 허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그 집착과 욕망의 길을 새로이 내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여기가 아니라, 저기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의 시선을 정리하고 재 조정해서, 나의 시선의 방향을 새로이 잡아가는 것, 그리고 그 옳은 시선을 둔 저기로 내가 걷는 것입니다.
“하늘의 나는 새를 보라.”
바로 우리의 정리된 시선, 재 조정된 시선, 우리의 시선이 가야할 방향은 저기 하늘입니다. 그래서 내 손에 있는 것, 혹은 내 손에 있지 않은 것, 그러나 남의 손에 있는 것에서 눈을 떼고, 나의 빈 두 손에 담을 저기 하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곳, 내가 선 곳, 내가 있는 자리,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기 하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는 일이 없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 가지도 못한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마 6:20-21)
나의 시선이 머무는 곳, 거기에 나의 마음도 머물 것이고, 그런데 거기가 하늘이면, 거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곁에 나의 마음이 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질문은 무엇이 너에게 보물이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물이 있을 곳, 값지고 소중한 보물이 있을 곳이 어디여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마음, 그것은 우리의 중심을 말합니다. 나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나의 중심을 말합니다. 그 나의 중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니다, 이건 신이 아니다, 그냥 내가 필요한 것이고, 단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 . . 그런데 점점 나의 눈을 뗄 수 없고, 나의 모든 것을 결정하고, 나의 일상을 좌지우지하고, 그러다 나의 인생의 목적이 되고, 의미가 되고, 그래서 나의 삶이 그것에 매달리게 되고, 그것에 의존하게 되고, 나아가 그것이 나를 조종한다면. 그래서 결국에는 그것이 나를 지배하게 된다면. 그건 그것이 바로 나에게 신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 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