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서, 길 위에서 길을 가르치는 예수 (14-3)
함께 읽고 걷는 더 드라마, 예수의 길 떠난 가족
1.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기 위해 먼저 배에 오르십니다. 그런데 얼마를 가지 않아 바다에 풍랑이 입니다. 세찬 바람과 거친 파도에 배에 물이 가득 차 오르고 금방 가라앉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배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라고 분명 말씀하셨는데. . . 이런 폭풍우 속에서도 주무시고 계시니 제자들로서는 주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웁니다.
“주님,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지금 죽게 생겼습니다.”
스승의 잠을 제자들이 깨워 화가 나신 것인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들 호들갑이냐? 왜들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러시고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어떤 말씀도 없이, 주님은 일어나시더니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십니다. 그러자 마치 잘 훈련된 강아지인 것처럼, 그 사납던 바람과 바다가 주님 앞에서 조용해지고 잠잠해집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지?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요 1:1-3)
이분이 바로 바람과 바다를 창조하신 그 말씀이십니다. 그 말씀이 제자들과 함께 배 안에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깨우니 일어나셔서 사납게 떠들고 나대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십니다. 그러자 그 바람과 바다는 주인이신 주님 앞에서 잠잠해집니다.
한 마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 한 마디 말씀으로 나병 환자와 로마 지휘관의 종을 고치셨고, 그 한 마디 말씀으로 지금 바람과 바다를 잠재우십니다. 그 분이 바로 창조의 말씀, 그리스도 예수십니다. 그 주님이 제자들과 같은 배에 타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몰랐습니다. 걱정과 불안과 두려움 속에 잡아먹을 듯 불어오는 바람과 거친 파도와 캄캄한 바다만 보았습니다. 타고 있던 그 작고 초라한 배만 보았습니다. 그 배 안으로 사납게 들어오는 시커먼 물만 보았습니다. 거기 나와 함께 타고 계신 주님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 주님이 바로 그 창조의 말씀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2.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사람들의 지역에 가셨을 때에, 귀신 들린 사람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오다가, 예수와 마주쳤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서, 아무도 그 길을 지나다닐 수 없었다.” (마 8:28)
무덤가입니다. 율법으로 금한 돼지 떼를 키우는 곳입니다. 더러운 곳, 불결한 곳, 불경한 곳, 불결하고 불온한 사람들이 사는 곳, 이방인들의 거주지역입니다. 예수께서는 골라도 참 아주 골치 아픈 곳만 골라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십니다. 만약 예수께 어디 여행 가이드를 맡기면 여행객이나 관광객은 고사하고 거기 현지인들도 잘 가지 않는 아주 불결하고 험악하고 위험한 변두리나 슬럼가들로 여행 루트를 짜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앙의 길을 떠난, 신앙의 유목민에게 거친 바람과 세찬 파도는 외부에서 불어오는 육체적, 물질적, 환경적 고통과 고난과 아픔, 그래서 외부의 악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어둔 무덤가와 귀신은 나의 내부에 있는 내적, 정신적, 심적, 영적 고통이고 아픔이고 어둠이고 그래서 내부의 악입니다.
나의 밖에서 이는 바람과 파도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자연계입니다. 나의 안에서 이는 바람과 파도는 불확실한 내일에 대한 나의 걱정과 근심과 불안입니다. 그리고 불안정한 현재에 대한 나의 불만과 분노입니다. 내 안에 있는 어둔 무덤입니다. 어둠은 내 안에도 있고, 내 밖에도 있습니다. 안과 밖에 이는 바람과 파도, 무덤과 어둔 물은 신앙의 길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현실이고 실제 상황입니다. 광야와 사막 한 가운데를 건너가는 신앙 유목민의 삶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여길 건널까요?
“‘하나님의 아들이여,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 . . 우리를 쫓아내시려거든, 우리를 저 돼지들 속으로 들여보내 주십시오.’ 예수께서 ‘가라’ 하고 명령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 돼지 떼가 모두 바다 쪽으로 비탈을 내리달아서, 물 속에 빠져 죽었다.” (마 8:29-32)
‘가라’ 주님의 그 한 마디 말씀으로 그 귀신들은 아까 그 사납고 거친 파도가 일었던 그 물로 그만 들어가버렸습니다. 주님의 한 말씀으로 성난 파도가 멎었듯, 이번엔 그 귀신들이 그 파도 아래로 들어가 잠잠해졌습니다. 바다를 잠잠케 하시고, 그 위를 거니시는 그리스도 예수, 그 생명의 말씀을 잡아야 우리는 불안정한 오늘과 불확실한 내일의 검은 바다와 어둔 무덤을 건널 수 있습니다.
3.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에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따르고, 아브라함이 갔던 길, 예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 하신 그 길을 따라가기 위해서 우리는 가벼워져야 합니다.
무겁게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너무 바빠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나에게 소중한 몇 사람 내 손에 잡고 안고 업고 함께 걷는 길입니다. 가볍게 가는 길, 가볍게 사는 삶, 그것이 우리 신앙하는 유목민의 삶입니다.
그리고 ‘길 떠나는 가족’의 수레는 무엇으로 꽉 차지 않고, ‘길 떠나는 가족’의 손에는 들린 짐 역시 많지 않고, 그래서 ‘길 떠나는 가족’의 수레는 가볍습니다. ‘길 떠나는 가족’의 얼굴은 무엇이 없지만 그러나 밝고 맑고 그리고 웃습니다. ‘길 떠나는 가족’의 발걸음은 가볍다 못해 춤을 춥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마 1:21-23)
우리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신 하나님의 ‘길 떠난 가족’입니다. 거기 수레 맨 앞에 아빠가 있습니다. 춤을 추는 듯 가볍습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십니다. 거기 그리 힘이 들지 않다 웃으며 수레를 끄는 황소가 있습니다. 우리를 이끄시고 인도하시는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거기 수레 위에 우리를 위로하시고 안아 주시고 또한 우리와 함께 놀아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지금 세 분이시며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수레에 타라 부르십니다. 함께 길 떠나는 가족, 길 떠난 가족이 되자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앞서시고 성령께서 이끄시고 그리스도께서 함께 타신 그 하늘 나라로 가는 수레를 함께 타고 가자 하십니다.
여기 <길 떠난 가족>의 수레처럼, 우리의 수레도 가벼워지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수레 위에 실린 짐들을 조금 내려놓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 없어서, 그리고 무엇이 더 있어야 해서, . . . 그렇게 우리의 어깨에 차곡차곡 쌓인 걱정과 근심의 무게를 조금 덜면 좋겠습니다. 더 이상 들어갈 공간이 없이 무엇으로 꽉 찬 우리의 그 마음을 조금 비우면 좋겠습니다. 빈 자리, 빈 공간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그 말씀의 능력을 믿고, 그 주님을 의지하고, 그래서 날마다 조금씩 덜고 비우고 내려놓고, 그래서 가볍게 주님의 길 떠나는 가족, 길 떠난 가족으로 먼 길 함께 가면 좋겠습니다. 여기 자식을 향해 손을 흔드는 아빠, 자식의 어깨와 다리를 잡고 웃는 엄마, 그리고 이제 그만 이 수레에 올라타라 우리를 쳐다보는 저 황소가 끄는 그 하나님 나라로 향한 ‘길 떠나는 가족’의 수레를 우리 함께 타면 좋겠습니다.
가다 보면 바람도 몹시 불 것이고 높은 파도도 일 것이고. 무덤가도 지날 것입니다.
“주님, 내가 죽겠습니다.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럼 내가 살겠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곧 우리에게 한 말씀 하실 것입니다. 이미 그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가 듣지 못한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그 배에서, 그 수레에서 내려올 생각도 말고, 꿋꿋하게 믿음으로 서로를 도우며 함께 버텨 그 길 함께 가면 좋겠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폭풍우 속에서도 예수께서 주무실 수 있던 이유는 바로 아버지 하나님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피할 굴이 되시고, 쉴 보금자리가 되시고, 머리 둘 곳이 되신다는 것을 예수께서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가 피할 곳, 우리의 쉴 만한 물가, 그리고 우리가 영원히 머물 곳이 되어 주십니다.
길 떠나는 가족, 길 떠난 가족. 그 한 가족이 되어, 여기 이 땅에서의 유목민의 삶을 주님과 함께 끝까지 걸어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