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서, 길 위에서 길을 가르치는 예수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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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 옆에 둘러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건너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셨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마 8:18-19)
여기 율법학자는 산 위에서 예수께서 하신 그 놀라운 가르침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보이시는 그 놀라운 기적도 들었거나 보았을 것입니다. 이 사람 역시 선생입니다. 율법학자는 선생입니다. 지금 한 선생이 더 높은 학식을 갖춘 다른 선생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학자에게 주님은 고작 자기보다 좀더 나은 선생일 따름입니다.
“예수께서 집에서 음식을 드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자리를 같이 하였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과 어울려서 음식을 드시오?’” (마 9:10-11)
선생이면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잘 알고 있을 텐데, 왜 거기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선생이 맞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단지 율법과 규칙을 알고 가르치고 또한 그것을 지켜야 할 한 명의 선생일 뿐입니다.
“그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표징을 보았으면 합니다.’” (마 12:38)
그들에게 예수는 학식을 넘어 대단한 기적도 일으키는, 그래서 조금 더 놀랍고 신기한 선생일 뿐입니다. 학생이 요구하면 다 들어주어야 하는 선생일 따름입니다.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막 10:17)
똑똑하고 율법 또한 잘 지키는, 게다가 부자이기까지 한 이 엘리트 청년의 그 질문 또한 심상치 않습니다. 칭찬을 들을 만합니다. 훌륭한 청년입니다. 이 청년에게 예수는 다른 선생들이 주지 못한 그 현명한 답을 줄 수 있는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선한 선생일 뿐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 병들어 아픈 사람, 그리고 이방인에게 예수님은 선생이 아니라 주님이셨습니다. 불결하고 불경한 죄인들에게 주님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또한 잘 지키는 정결하고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고작 선생이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마 8:20)
지금 주님의 말씀은 네가 과연 방랑자의 삶을 살 수 있겠느냐, 유목민의 삶을 살수 있겠느냐, 불확실한 미래를 꿈꾸며 불안정한 삶을 살 수 있겠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집을 떠난 아들 예수, 그 하늘 아버지의 옆 자리를 버리고 이 땅에 사람으로, 낮고 낮은 사람으로 섬기는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길, 버리고 떠나는 그 길을 네가 갈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2.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말합니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두어라.” (마 8:21-22)
이런 말입니다.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먼저 가서 할 일이 있습니다. 그걸 우선 하고 난 뒤에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지금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우선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것을 먼저 마무리 짓고 다시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이 제자는 지금 아버지 장례를 치루기 위해 가야합니다. 확실한 이유이고, 합당한 이유입니다. 유대인 남자가 아니더라도 자식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가장인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이 제자는 남은 가족을 부양할 책임도 있습니다. 그리고 1년 후에는 그 아버지의 뼈를 다시 모아 무덤에 제대로 모셔야 할 것입니다. 이것 저것 따지면 적어도 1년은 걸릴 것입니다. 사실 그 이후도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얼마나 걸릴지,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 . . 사실 세상 일이 어떻게 전개가 될지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의 할 일은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들, 꼭 해야 할 일들, 먹고 사는데 필요한 일들, 현재 뿐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위해 지금 해야 하고 필요한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랍니다.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두어라.”
나를 따르려면 불효자가 되는 것도 두려워 말아라, 패륜아라 손가락질 받을 각오도 해라,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못된 자식이 될 용기, 매정한 부모가 될 각오, 나쁜 친구가 될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의 도리, 자식의 도리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Lord, let me go first, and bury my father.)”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두어라.”
주님의 말씀은 너에게 first는 누구이고,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즉, 지금 너에게 그 어떤 것보다, 그 무엇보다, 우선이 되는 것, 맨 먼저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 . . 그런 의미 없는 순서와 차례의 나열 말고,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정말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first인 것, 그 하나를 제외하고는 사실 그 나머지 것들은 다 두 번째, second입니다. 하나의 first와 수 많은 second만 있을 뿐, first가 아닌 것은 모두 다 second일 뿐입니다.
지금 이 제자에게 주님은 first가 아닙니다. 그래서 second인 주님을 따를 시간이 없습니다. 마음으로는 주님이 first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 주님을 따를 의지도 물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만큼 주님을 따라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아까 그 율법학자와는 달리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전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갈 시간이 없습니다. 먼저 다른 것을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제자의 그 머릿속엔 온통 그 일, 그 생각 뿐입니다.
한 성경 학자가 말합니다.
“지금 시간이 없어 ‘무엇’을 못한다’는 말은 그 ‘무엇’이 나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일 것이다.”
(→ 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