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대신
학교에 종종 취업 현수막이 붙는다. 취업 현수막이라 함은, 대기업의 신입 사원 모집 공고, 그 비슷한 기업들의 캠퍼스 리쿠르팅 안내 공고 또는 취업 박람회 공지 같은 것들.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 ‘왜 대학에 왔는가’를 써내는 과제가 있었다. 다시 읽어보니 꽤나 새롭고 재밌다.
“배치표를 따라 줄 서 있는 수많은 학교와 학과들 중에 내 성적에 맞추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선택의 폭이 좁아졌고 그렇게 나는 그 선택지에서 가장 내가 끌리는 곳에 오게 되었다. 검증해 보지도, 경험해 보지도 않았지만 그저 막연하게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또는 ‘배워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정도의 이유였을 것이다. … 내가 대학에 온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알 수 없는 이끌림이 과연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이었을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그런 생각을 했구나. 다른 사람들은 이 과제에 뭐라고 써냈을까. 지금 학교의 취업 현수막을 보는 대학생들에게 이 과제를 준다면 그들은 또 무어라 쓸까. 좋은 곳에 취업하려고, 뭐 그런 걸 쓸까? 아무래도 조금 돌려쓰는 게 미덕이니 전공에 대한 지식을 쌓아서 사회의 일원으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라고 쓸 수도 있겠다.
일반적이라는 표현을 지양하고 싶지만, 일반적으로 ‘졸업 후’에 관한 옵션은 취업이라는 하나의 선택지로 귀결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대학이란 건 취업의 문턱을 위해 존재하게 되었고, 배우는 내용이나 과목들도 실용적이고 실무적인 것이 본래의 것보다 더 주입되고 있는 것 같다. 그것들이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어떤 면에서는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이런 건 앙꼬없는 찐빵 같달까. 꼭 있어야 할 것이 없는데도 그런대로 이해받게 되는 느낌이다. 혹자는 그런대로 이해받는 느낌도 괜찮다고 생각할테지만 괜찮지 않지 않나. 나는 내가 기억나지 않는 나조차도 떠들어댔듯이 의미라는 것이 중요해서 말이다.
무엇보다 이게 괜찮지 않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히 취업이 하나의 답안이라서가 아니라, 그게 무엇이든-굳이 취업이 아닐지라도 어떤 단 하나가 답이 되는 사회가 형성된다는 것이 문제적이기 때문이다.
도행지이성이란 말을 좋아한다. 길은 가는 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 다른 사람, 다른 삶. 그래서 다른 길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전하고 인정해야 한다. 여러 개가 답인데 사회는 자꾸 하나만 찾으려 한다. 그래서 그 문제를 마주하는 우리는 볼 때마다 헷갈리고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학과 취업의 관계는 그저 하나의 예시에 불과하다.
다수가 가는 길이 아닌 곳에 발자국을 내는 사람들의 선택이 이상한 것이 되지 않는 사회이길 바란다. 그들이 가고자 하는 길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가기도 전에 핀잔과 조롱으로 그 선택이 제한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윤성근이 그의 책 <헌책 낙서 수집광>에서 말한 것처럼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사람은 길을 자주 잃어본 사람이며 "그가 가는 길은 보통 사람이 보기엔 엉뚱한 곳 같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산 정상에 이르는 새로운 길이"되는(77쪽) 법이다. 인생은 결코 완벽하게 구획이 나뉜 계획도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