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싱글맘을 바라보는 시선
자주 보아야 이쁘다
내가 사는 동네는 농촌이다.
마늘과 양파 등.
농사를 업으로 생활하는
주민들이 대부분이다.
이혼하고 집에 내려왔을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동네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2천년 밀레니엄 시대로
들어섰지만, 내가 사는 시골은
정이넘쳐 오지랖이 넘치고,
선의 경계가 의미가 없었다.
집안의 풀이 조금만
자라면, 어른들이 지나가면서
한 마디씩 한다.
"야야!풀 좀뽑아라!"라든가,
불쑥불쑥 집에 들어와서
앉아서 이야기를 하곤한다.
결혼하고 도시아파트살때는
외롭기도 했었다.
집집마다 꽉 닫힌 철제문들이
숨이 막힐정도로 큰 장벽같았다.
시간이 지나자,
사생활 보호해주는 도시가
편하긴 했으나, 이웃간의 정이
허기지도록 고팠었다.
이혼한 사람도 흔치 않았고
이혼하거나 사별한 사람이
있긴 했지만
쉬쉬하며 고향이 아닌
타지에 살았기 때문이다.
동네사람들은 엄마를 마주치면,
위로하는 척 이야기하다가
"그 집안씨는 놔두고 오지.
데리고 왔노? 나중에 다시
재혼하게 되면 재혼상대가
안 좋아할 수도 있다"
말 좋아하는 어른들의
오지랖을 알기에,
엄마는 그냥 웃기만 할 뿐.
아무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진 군인공무원으로
퇴직하셨고, 엄만 한복집을
오래 하셨으며, 오빠는
행정공무원 이었기에,
우리 집은 윤 상사네 집!
그 동네 한복집!
아니면 윤 주사네!
내가 사는 면에서는
우리 집에 대해서
물으면 다 통하는 집이었다.
아직도 영향력은 조금있다.
아버지와 오빠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동네사람들 모여 쉬는
쉼터에 가서 같이 놀아주었고
오빠는 퇴근해서 오면
아들을 데리고 놀러 가기도
하고 공부를 가르쳐 주곤했다.
가족의 노력 때문이었는지
동네에서는 어른들이
아들을 이뻐라 해주셨다.
어느 날,
급하게 병원 갈 일 생겨
버스시간이 맞지 않아서
택시를 타고 가야 했다.
택시기사 아저씨는
오빠의 선배였다.
"윤양아!
(그 아저씨는 나를 아직까지
그렇게 부른다. 어릴 때부터
봐와서 그런가 한다)
니 이혼했다매? 결혼한 지
몇 년 안됐쟎어.
밤일을 잘 못해줬나?"
여자는 남자한테 잘
맞추어 주어야 된다는 둥
계속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듣다가 화가 나서 큰소리로
"아저씨 그만 떠들어 재끼고
빨리 가입시더."
"놀래라. 야는 이 아저씨가
피와 살이 되는 이야기를
해 주는구먼."
"그런 이야기 안 해도 되니깐
그냥 가자니까요."
지금의 나였다면
바로 신고했을 텐데
그 당시에는 어린(?)나이였고
겁이 났으며, 불편하여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들이 중학생 이었을 때
우체국 갈 일이 있었다.
통장개설 할 일이라 부모의
동의가 필요해서 서류준비를
하여 아들과 같이 방문했다.
도시가 아니라 시골이어서
직원을 몇 번 보지 않아도
친해지는 사이가 된다.
여직원이 서류를 보더니
아들에게
"엄마. 아빠 이혼하셨네요!
친권자는 엄마이고!"
아들이 그 말에 조금
어이없어하다가, "네에"하니
여직원이 "왜 이혼하셨나요?"
(지금은 통장개설이 까다롭지만,
예전에 수월하게 만들 때였다)
아들이 화가 나서
"아니, 아줌마!
여기가 경찰서예요?
엄마아빠가 이혼한 거를
왜 물으시는데요?
남의 사생활을~
통장하나 만드는데 그런
이유도 말해야 되나요?
이혼사유 이야기 해야 하는
규정이 따로 있나요?"
여직원이 순간 놀래서
"학생! 그런 뜻이 아니라
난 단지 확실하게
해야 될 것 같아서"
"뭘 확실하게 해야
하는 건데요?
통장 만드는 것도 이혼처럼
마음 아프고 고통받으며
해야 되요? 엄마 가자!"
우체국장이 나와서
아들과 나에게
"미안하다. 가족 같아서
그랬는 것 같다."
정중히 사과를 하셨다.
나도 아들에게 끌려 나오면서
미안하다고 고개 숙여 인사하니
아들은
"엄마가 뭐가 미안하냐?
왜 자꾸 바보같이 착하게만
살려고 하냐?
엄마 때문에 속상해"
난 아들을 속상하게 만드는
바보 엄마였고, 정정당당하게
맞서서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어리숙하고 나약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