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향해 천천히 조금씩 걸어 나와요~
이혼도 후유증이 있구나!
이혼 후 집에 내려왔을 때,
아들은 6살 되기 전이었다.
외갓집은 와보았지만
이렇게 오래 있는 줄은
몰랐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집에 언제가?
물어보지도 않았고,
할아버지나 아빠 보고 싶다고
떼쓰지도 않았다.
이 상황을 아들은
완전히 이해 못하겠지만
설명해 주었다.
"알겠어"대답하였다.
그 이후로 아빠를 만나,
할아버지도 뵙고
자고 온 적도 몇 번 있었다.
어느날, 아빠가 집 근처에
와 있었는데도 할아버지에게
안 간다고 울면서 떼를 썼다.
달래도 소용이 없자,
그 사람은
자기 집으로 차를 돌려 가버렸다.
아들이 울면서 나에게
"이제 아빠집에 안 갈 거야."
"할아버지께서 보고 싶어
하는데 가야지!"
"안 갈래!
할아버지집에 갔는데
아빠 여자친구도 있었어.
김치볶음밥도 해주고
다른 것도 해주었는데
맛 없어.
그런데 할아버지랑
아빠는 잘 먹었어.
이제 우리 집이 아니야.
거긴 엄마도 없고,나도 없어!"
아들이 가지 않겠다는
말을 전화로 전해주었다.
"알았다" 하고는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그래! 넌 원래 나에게나
아들에겐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냥 내가 이해할게!
그 집을 떠나올 때 나에게 가진
돈이라고는 아들 유치원
보내려고 모아둔 70만 원이
전부였다. 위자료라는 걸
생각지도 않았다.
돈도 없을뿐더러, 본인카드 외
내 카드로도 쓴 빚쟁이였고,
이혼할 때 판사님이 양육비
잘 챙겨주라 했을 때
성실하게 대답했으니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양육비를
주지도 않았고, 전화로 몇 번 독촉했지만"나중에"라는
이야기들을 때마다 맥이 빠졌다.
나중에는 내가
치사해서 돈 달라는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가족이나, 친구들은
"바보야! 양육비라도 받아야지!"
화를 냈지만,
난 싸우는 게 너무 싫었고
그래도 지 새끼인데
언젠가는 주겠지!
라는 믿음과 제일 컸던 마음은
그래도 사랑이라고 생각했었던
추억이란 놈이 있는 우리였는데
돈으로 싸우는 얼룩진 끝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안 주면 내가 벌어서
아들 잘 키우면 되지!
이상한 오기도 생겼다.
직장을 알아보고
취직을 하였지만.
나는 부적응자였다.
일하면서도 순간순간
올라오는 분노와 절망감으로
슬픔의 감정을 주체 못 해,
울기가 일쑤였다.
적응하지 못하고 하루 만에
그만둔 회사가 몇 군데였다.
어느 날, 변화를 주기 위해
미용실로 걸어갔다.
조그마한 면단위의 농촌이라
누구! 누구! 하면 다 아는
사람들이다. 미용실 원장은
학교 1년 후배의 가게였다.
1년 후배라는 것과 딸과 함께
혼자 산다는 것만 알 뿐.
친분이 전혀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손님도 없었고 조용했다.
쭈뼛쭈뼛 거리자,
그 아이는 반갑게 웃으며
"언니 앉아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미용의자에 앉았다.
한참 후 그 아이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나의 손을 잡았다.
내가 놀라서 그 아이를
동그랗게 쳐다보니,
"언니! 얼굴이 너무 어두워요.
며칠 전에 언니엄마께서
머리 하러 오셨어요.
오빠가 모시고 왔었어요.
엄마가 많이 우셨어요.
언니는 잘 살 줄 알았는데
하셨고, 오빠는 위자료도
한 푼 안 받고 왔다면서
바보 같은 계집애라고
말을 했지만, 오빠도 막내가
불쌍하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언니! 아파하지 말아요.
언니 옆에는 사랑하는
가족들도, 걱정해 주는
사람들도 있어요. 나도 혼자된 지
몇 년 안 되었지만,
우리에게 아이들이 있으니
그 아이들을 보면서
또 힘을 내야 하니까요.
별 일 아니에요.
걸어가다 넘어졌다고
생각하면 편하더라고요.
조금씩
천천히
걸어 나와요.
급할 것 없어요"
그 아이의 말이 나를 위로
하는 것 같아 울었다
아무 말 없이 그 아이 붙잡고
한 시간가량 운 것 같았다.
그 아이는 그냥 말없이
내가 우는 동안
옆에서 나의 등을 쓸어주며
가만히 있었다.
"이제 열심히 살아볼게!
원망하지도 않을게.
아파하지도 않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