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하지 못한 막내!
재작년(2022년) 4월 말.
건강하셨던 엄마가 갑자기
엄청난 고열로 움직이지
못하셨고 응급실에 실려가셨다.
남편이 따라가면서 밤새 엄마 곁에
있어 주었다. 보호자증이 남편에게
있었기에, 남편은 출. 퇴근하면서
매일 엄마를 보러 갔었고
폐렴치료가 잘 되어 며칠 후
퇴원할 수 있다고 했다.
몸이 조금 호전이 되었는지
엄마는 내게 전화를 걸어
"00(아들이름)이 오나?
강아지들 잘 있제?
야야! 니가 수고가 많다"
전화를 받고 엄마가 보고 싶어
다음날 병원으로 향했다.
코로나검사하고 음성이 나와
병실에 올라가니 엄마는
다리가 불편하셔서
침대에서도 내려오시지 못했고
답답해하셨다.
"엄마! 모레 퇴원할 수
있다니깐 조금만 참어요.
밤에 내려오시면 안 돼요"
"집에서 빗이나 가지고 오지!
알았다. 고만 잔소리 하고
집에 가라" 화를 내셨다.
평소에 짜증 부리시지
않는 양반인데, 병원이 많이
답답한가 보다 생각했다.
엄마의 성격을 알기에 편의점에
빗하나 사서 엄마손에 쥐어주고
집으로 왔다.
엄마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갑자기 모든 상황이 나빠져서
엄만 못 일어나시고
나를 보고 뭐라고 말하시면서
울기만 하시더니
몇 주동안 혼수상태로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엄마의
마지막 길을 배웅해 드렸다.
3일간 남편과 난 상주로서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키워준 할머니를 못 본다는
생각에 아들이 쓰러지며 울었고,
우는 아들과, 언니들과, 조카들을
달래주어야만 했다.
발인하는 날
내 휴대폰에 문자와 카톡이
오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지인들과 카드회사와 보험회사
병원등의 축하메시지였다.
엄마를 보내는 날 내 생일이었네!
꾹꾹 참아왔던 슬픔을 그제야
토해내듯 나는 울 수 있었다.
첫 결혼 몇 년을 제외하고는
50년을 엄마랑 같이 지내왔던
나는 이상했다.
퇴근해서 집 현관문을 열면
"이제 오나! 오늘 수고했데이"
그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갔다 늦으지면,
엄마한테 늦는다고
전화해야겠다!
전화기 들면 받을 엄마는 없다.
평생을 고생하신 엄마다.
일본나고야에서 태어나
(엄만 토종한국인입니다.)
조센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했으며,
독립운동하는 외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형제들 때문에
늘 가슴 졸이며 생활하셨고,
독립되어 조국으로 돌아와서
6.25 전쟁으로 외할머니의
죽음으로 동생들을
키워냈어야 하셨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고생하셨고
무뚝뚝한 남편은 박봉의
월급마저도 매달 큰 집에
줘 버려서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너무나 잘난 아들은 사고와
병으로 병원에서 몇 년 동안
간호해야 했다.
그 아들을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딸 셋은 하나같이 정상적인
결혼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아야만 했다.
막내딸 고생한다고 손주까지
키워 내야만 했던 엄마였다.
남편과 결혼 후, 엄마는
"아고 이제 막내랑 이서방
잘 지내니 이제 내는
죽어도 여한 없다"
하셨던 말씀이 떠올라 목에
뭐 하나 끼인 것처럼 매인다.
엄마 돌아가시고,
몇 달을 멍한 상태로 지냈다.
남들은 엄마가 89세에 가셨으니,
오래 사셨는데 가실 때도 되었지!
오랜 시간 아프지 않고 가셨으니
너희들이 축복받은 거다!
말들을 하였지만 난 늘 힘들었고
온몸이 아팠다.
작년 4월
교구청 직원 120명 정도
일본나가사키와 고토 성지순례를
4박5일을 다녀왔었다.
일정이 너무 빡빡하고,
걸어 다니는 시간이 많았다.
집순이인 데다, 저질체력인
난 힘든 시간들이었고,음식도
맞지 않아 매일 힘들었다.
나를 많이 힘들게 했던 건
일본의 높은 습도냄새를
맡을때 마다, 엄마에게 났던
향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깊숙이 들어가면 갈수록
엄마의 향기가 더 진하게 느껴져
많은 눈물을 쏟아냈다.
성지순례 전, 알레르기 때문에
고생했었고, 심한 몸살로
오지 못 할뻔 했으나, 일본에 오게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엄마가 내게 말씀하시는 듯
"막내야! 정신 단디 차리고
살거래이"
그 말씀을 내게 전할려고
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