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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는 윤별경 Jul 06. 2024

엄마의 장례(葬禮) 중에

왜 거기서 우노?


남편의 제일 친한 친구 부인의

장례가 있어

어제저녁 가기로 하였다.

남편은 "당신 괜찮겠?"

"괜찮아. 가자!"


장례식장은 엄마를 보내었던

곳이었고, 엄마와

마지막인사했던 VIP실. 

같은 호실이었다.


이제 50도 되지 않은 그녀는

뭐가 그리 급했을까?


저혈당쇼크로 산소마스크를

써야 할 만큼 긴박한 상황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한 달 전에

들었고, 조금씩 나아져

나에게 요양병원추천받아

예전에 같이 근무했었던

수간호샘이, 지금은 간호부장

으로 되어 근무하는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끝내 함께하지 못하고 그렇게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평소 답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남편은 말없는 나의 손을

조용히 잡으며

"당신 괜찮은 거지?

장모님 생각하는 거야?"


"괜찮아. 혜엄마 나이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참! 당신 생각나나?

엄마 돌아가신 첫날

큰언니가 와서~~"

조잘조잘 엄마장례 중에 있었던

야기 풀어내는

내가 많이 좋아졌구나!

스스로 느꼈다.




엄마는 2022년 6월 중순

오후 5시. 운명하셨다.

손을 잡고 너무나 슬프게

내딸을 두고 가셨다.


무서울 정도 내리는 비와

거센 바람다고 느껴지는

스산한 날이었다.


장례식장을 간호부장님이 계신

요양병원장례식장으로

정해졌고, 부장님의 배려로

VIP실로 옮겨졌다.

코로나시기였지만, 완화된

시기여서 성당에서 신부님과

수녀님들과 많은 신자 분들이

오셔서 선종기도를 해주셨다.

그 외에 친척분들과 친구들이

조문하고 갔었다.


큰언니는 경남에 살고있어

조카들과 만나오기로 하였다.


밤 11시가 넘어서조용했고,

우리 가족들과 작은언니 조카만

있게 되저녁사를

할 수 있었다.


새벽 1시 남편과 아들.

언니네는 피곤한지 자고 있었고

나는 엄마영정 앞에 조용히

기도하며, 엄마를 지키고 있었다.


고요한 새벽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엄마~~ 엄마~~"

옆호실이었다.

그날 오전에 돌아가신 르신

장례실이었다. 난

따님 오셨나 보다!

생각하였고, 여자분이

너무나 서글프게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웅성웅성해서

밖으로 나와보니,

큰언니가 주저앉아 울고 있었고

그곳의 상주분들이 나오셔서

언니를 안내하고 있었다.


큰 언니는 호실을 잘못 찾아

옆호실에서 울고 있었고,

아버지를 잃은 옆호실에선

'엄마'라며 통곡하고 있는

여자를 보니, 그분들도

쉬고 있다가 놀랐다고 했다.


얼른 뛰어가서 언니를 부축하니

술냄새가 진동했고, 조카들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 가족들은 자다가 놀라서

뛰쳐나왔다.


" 거서 우노?

내가 주소랑 호실까지 문자로

보내줬는데, 조카들은?"

"주차시킨다고 먼저 들어가래서"


옆호실 상주분들에게

죄송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온

언니는 엄마영정 앞에서

엉엉 통곡하기 시작했

술기운인지, 슬픔인지

모르겠으나, 아침까지 울다가

쓰러져 자고 있었다.


오랫동안 식당을 하는 언닌

단골손님들이 건네는 술을

한잔씩 마시기도 한다.

엄마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손님들

한잔. 두 잔 받아먹다 보니

꽤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고 했다.


조카들이 전주에서 경남으로

태우러 오는 시간도

있었고, 본인 때문에 엄마가

마음고생 많이 한 것 같아

더 아팠을 거다.

우린 한바탕 소동을

끝내고 나서야 제대로

엄마를 잘 보내드렸다.




16년 전에 남편을 먼저 보내고

3주 후 너무나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보냈으며,

몇 년 전 둘째 사위도 황망하게

보내야 했던 엄마는

쓸쓸하고 고독한 삶을

살았으나, 가시는 길은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7년간 막내사위가 아들노릇을

하였으며, 허리 아프실 때에도

딸이 출근하고 없는 시간

사위가 식사대접하였으며,

아프셔서 병원 실려가실 때는

사위가 밤새간호하였고,

매일퇴근해서 엄마 곁을

지켜준 사람도 막내사위였다.


돌아가셨을 때는 많은 분들이

기도를 해주셨고, 쓸쓸하지

않으시게 많은 분들이

장례식장을 오고 가셨다.


남편친구 지혜엄마!

그녀 또한 쓸쓸한 인생

이었을 것이다.

아가씨였던 그녀가

어린 아들과 장애가 있는 딸

키우고 있는 이혼남에게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었다.


사업하느라 시간이 모자라는

남편에게 섭섭하다는 소리

한마디 없이 아이 둘을

잘 키워냈던 그녀였다.


항상 조용하고 따뜻 

그녀였기에,

장례식장은 많은 분들이

그녀를 기억하고 있고,

한 번도 오지 않

친정식구들 장례식장에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엄마와 지혜엄마.

그리고 뜨거운 인생을,

어쩌면 쓸쓸하고도

찬란했었던 이 세상을

살다가신 망인들을 위해

조용히 기도를 한다.


그들의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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