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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는 윤별경 Nov 30. 2024

에이꼬엄마와 가사꼬언니



(이 글은 나의 어머니

강영자여사님께 드리는

헌정의 글입니다.)


1945.

일본에서 한국으로 오는

배안는 외할아버지와 엄마와

엄마의동생 셋과 타고 있었다.



"에이꼬. 조금 있으면

부산항도착이다. 작은 아버지가

나와있을 테니 동생들하고

작은아버지 집에 가면 된다."

"아버지는요?"

"나는 부산에 있는 친우보고

갈 테니, 작은아버지 따라

진해집에 먼저 가있거라"


그렇게 엄마는 13살에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았다.

"에이꼬. 이제 네 이름은

영자다. 영자라는 이름을 써야 한다

게이꼬 넌 경자다. 알았지?"

그렇게 에이꼬 엄마는 영자.

게이꼬 이모는 경자라는

한국이름을 외삼촌 두 분도

한국이름을 가졌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께서 한글을 가르쳐

주셔서 쓸 줄은 알았지만

말하는 건 쉽지가 않았다.


갓집 식구들은 종 한국인

이었지만, 한국에서의 삶은

고단했다. 일본에선 외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형제들이 독립운동

하셨기에, 늘 조센진이라는

꼬리표가 붙여져 도망 다니기

바빴고, 태평양전쟁의

힘든 시기에도 힘들고

아픈 시절을 보내야 했다.


한국에 와서도 한국인이었지만

엄마의 말투와 어릴 때부터

몸에 베여버린 일본의 문화 때문에

진해의 동네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저 집사람들 바리사람들이다."

동네분들은 외갓집식구들에게

돌을 던졌고, 왕따를 시켰다.


오랜 시간 집식구들의

친절함과 우직한 마음으로

사람들과의 왕래도

생기게 되었다.

엄마는 늘 남을 배려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눈치 보며

사셨다고 하셨다.

엄마가 결혼하고

살고 있는 이곳

할머니댁에서 몇 달을 사셨다.


동네에선 수군대는 소문에

엄마를 멀리하였다고 했다.

"저 윤씨집 막내며느리

일본사람이라더라.

에구 저 집 독립운동한 집안인데

바리 며느리를 봤는지 몰라"


엄마가 시집왔을 때.

가사꼬언니는13살 국민학생

이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되었던 그다음 해에

아버지의 둘째 형에게 안겨

한국으로 왔다고 했다.

아버진 7형제의 막내였다.

가사꼬 언니는 제일큰아버지의

유일한 혈육이었고, 고아였다.


큰 아버지는 일본에서

독립운동 하시다가,

일본군에 끌려 소련으로

강제징역으로 끌려갔고,

큰어머닌 가사꼬언니

돐이되기전에 큰아버지의

부재로 상심이 크셨는지

병으로 돌아가셨다.


둘째 작은아버지 손에 크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할머니와

큰집식구들의 손에 자라났었다.


그런 가사꼬언니를 엄마는

이뻐라 하셨고, 엄마가 없는

언니는 의 엄마에게 엄마의

리움을 일본에서 같이 자란

나의 어머니께 찾았는지도 모른다.


아버지형제들은 큰아버지

생사를 찾아 헤맸었으나

끝내 찾지 못했고, 공무원이

되었던 오빠도 큰아버지의

유해라도 찾을 수 있을까

몇 년간 노력했지만 그 어디에도

큰아버지를 찾을 수 없었다.


20년 전

가사꼬언니는 대구에서 생활하다

나이가 들어 고향인 여기에,

형부와 함께 우리 집 근처로

이사를 왔다. 엄마에게

 "숙모. 나왔어!"

자주 놀러 왔고, 이젠 나이 지긋한

두 분이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동무가 되었었다.


어느 해인가.

두 분이서 이야기를 하는 걸

옆에서 듣고 있었다.

"옛날에 일본에 산 이야기를

함부로 안 하게 됩디다.

난 고작 6살까지 밖에

못살았는데 숙모도 그랬죠?"


"그러게 그랬지. 한국사람인데

매번 눈치 보며 살았어.

일본 살 때는 조센진이라고

천대와 멸시받고 두들겨 맞고

한국에 와서는 쪽바리라고

욕하고  순간

우리 한국사람이에요.

설명을 해야 되었어.

솔직히 그때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밉더라.

한국사람인데도 일본 살았던

이유로 돌팔매질하고 무시해서

무섭기까지 하더라.

우리 아버지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바쳤는데.


나는 가사 니가 일본에서

살았고 어찌 되었던 나의

안태고향이 나고야였으니,

동질감이 있어서 네가 좋았어.

부모 없는 안쓰러움보다

일본이라는 공통점이 좋았어."


"숙모. 저도 그랬어요.

그래서 숙모가 좋았요.

내 아버지는 차디찬 외국에서

고생하며 돌아가셨고,

난 한국에 왔는데 이방인이 된

느낌입디다. 천하의 고아가

더 차가운 고아로 내몰려서

힘든 세월 냈어요"



이 세상에서 사시느라

수고하셨던 어머니!

이뻐라 했던 가사꼬 언니는

83세 할머니 되었네요.

오늘도 유모차 끌고 경로당에

놀러 다.

만약에 다음 생애가 있다면

꼭 있다면,

무척이나 사랑받는 곳에서

태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어릴때가족사진.서문시장에서 엄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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