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떠난 맛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by 미스준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image.png?type=w773 사진: Unsplash의Annie Spratt

'아빠가 떠난 맛'은 어떤 맛일까?

친척집에 여름방학동안 맡겨진 소녀는, 친척아줌마가 비밀의 장소라고 데려간 우물에서 맑은 물을 처음 맛보며 그 맛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


세상에서 가장 후련한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었을텐데, 다른 말도 아닌, 아빠라는 존재를 부정할 때 느껴지는 기분이라니!

나를 (맡겨)버린 아빠가 드디어 내게서 떠나는 순간

처음부터 아빠의 딸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아빠가 가버리고 다시는 나를 데리러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아빠가 소녀를 학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섯이나 되는 아이를 낳았으면서도, 아이들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고,

아이들을 위해 써야할 돈을 도박과 술에 쓰는 아빠.

형편이 어려워 딸을 잠시 위탁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전혀 없고,

집으로 돌아온 아이를 반가워하지 않는 아빠.


부모에게서 사랑받지 못하고 방치된 소녀는, 존엄하게 살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건지, 또 무엇을 해도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누구를 도울 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줄도 모르는 소녀는, 위탁가정에서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우편함까지 최대한 빨리 뛰어갔다 오면 새로운 소식을 가져오는 자신을 아저씨가 늘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줌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잠들기 전 아줌마의 도움으로 한글자씩 글을 읽어내려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짜 엄마와 아빠는 소녀에게 해주지 않았던 것들.

어린 소녀는, 어리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어야 했고, 조금씩 누군가를 도울 수도 있는 것이어야 했다.


자식에게서, '없어져서 후련한 맛'으로 평가되는 부모가 되지 말자.

소녀의 눈으로 읽는 책이지만(소녀인 '나'가 화자), 삶이 갑갑했을 어린 소녀에게 어떤 어른이 필요하며, 나는 그런 소녀들에게 괜찮은 어른으로 살고 있는지 생각한다.


#맡겨진_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