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에게 '최악의 일'은 무엇일까?
현재 내가 '최악'이라고 느끼는 일보다 더 한 일이 앞으로 벌어지지 않을거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나의 최악은 언제나 미래형이다.
이건 너무 불행한 일 아닐까?
지금 알고 있는 나의 최악이 언제든 업데이트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산다는 건, 어떤 요행이나 행복을 바라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거니까 말이다.
최악의 일이 이미 지나갔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어떤 불리한 상황이 내게 이미 벌어졌다는 의미보다는
그 상황에서 내가 벗어나기 위해 어떠한 결단을 내렸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싶다.
<나의 아저씨>에서 동훈에게 최악의 일은, 내 아내가 (사이가 껄끄러운) 나의 직장상사와 바람이 났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아내의 불륜사실에 대해 자신과 가족이 모르도록 조치하고 덮기로 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최악의 그 일이 지나가도록 했다.
물론 그런다고 상황이 나아진다는 것은 아니다. 잘 덮으려고 했지만 결국 모두가 알게 되었고, 그가 한 결단은 댓가를 치루어야 했다. 그렇다고 동훈은 아내의 불륜을 덮으려고 한 그의 결심을 후회할까? 다시 돌아가도 아마 그는 같은 결정을 할 거다. 그런 결정을 하지 않고 만약 분노를 아내에게 터트리는 결정을 했다면 그는 이후의 불행을 더 잘 받아들였을까? 나의 결정은 나의 책임이고, 최악의 일이 나를 온전히 뒤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스치듯 지나가도록 유도하는 결정이다.
겪어야 하는 불행이 나를 덮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은 나를 나락으로 보낼 것이다.
겪어야 한다면, '어떻게 겪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나의 면역력을 높이는 방법이다.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다. 그 후 대응이 중요하다.
내가 겪은 최악의 일은, 3년 전 건강을 잃었던 것이다.
진단을 받았던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쥐어짜는데 몰두했다.
1. 찬찬히 흩트러진 정신을 정비한다.(어떤 것도 내 잘못이 아니다)
2. 무질서한 나의 상황을 정리한다.(재산, 부채, 보험 등 정리, 쓸모없는 책, 옷 등 버리기)
3. 당장 해야하는 것을 리스트업한다. (치료일정 맞추기, 시기별 업무 배분, 휴직)
4. 바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을 당장 시작한다(칼퇴근, 만보걷기, 근력운동 홈트, 식단개선, 수면개선)
5. 알려야 할 필요 있는 사람에게 나의 상황을 말한다.(부모, 자녀, 친구, 직장동료 중 선별적으로, 최대한 나중에, 최소의 인원에게, 가급적 간결하게)
최악의 일을 받아들이고, 2번까지만 해도 이미 최악은 지나가게 된다.
나는 이렇게 최악의 일을 지나왔다.
이후의 삶은?
동훈이 말한 것처럼은 안된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이건 정말 잘 안되더라.
내게 벌어진 최악의 일이 '아무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낸 또 하나의 '하루'였고, 내가 이 또한 잘 통과하고 있다는 자신감과 안도감을 얻었다. 최악의 상황을 바로 보고 심하게 휘청이지 않도록 '나를 달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나를 달래기로 결심한 순간, 이미 최악은 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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