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엄마는 내가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시절의 자신에 대해 입을 다문 채 이 세상을 떠났고, 그럼으로써 내게는 제한된 정보만으로 독자가 적극적으로 상상해내야 하는, 소설 속 인물들과 다르지 않게 되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기억은 더욱 희미해지고 상상과 뒤섞일 것이다. 무엇이, 누가 실제로 어떻게 존재했는가는 모호해질 것이다. 기억에도 반감기가 있다면 그것은 언제일까. 그날의 빈소에서 나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작가의 엄마가 결혼 전 여군이었다는 사실을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비로소 알게되었다.
그 시절, 결혼 전 여자가 직업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는 것을 곱게 보지 않았던 사회적 이슈가 있었기에 엄마는 가적에게 여군으로 살았던 시간을 감추고 싶어했을 수 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나 비로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에 대해 궁금해졌고, 기억하는 엄마마저 언젠가는 기억너머로 사라질 수 있겠다는, 무심한 자식의 회한.
엄마의 어린 시절, 엄마의 학창시절, 엄마의 대학시절, 엄마의 직장시절, 그리고 엄마의 노년을 우리는 그닥 알고싶어하지 않는다. 그저 한참의 시간이 지나, 혹은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나 엄마에 대해 추억하는 모종의 이슈가 있을 때, 무심결에 '아, 내가 우리 엄마에 대해 아는게 별로 없구나.'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제서야 '비로소' 엄마를 늘 존재하는 공기처럼 여겼던 자식으로서의 무심함과 무정함을 탄식하며 '불효자'임을 고백한다.
엄마는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외가에서 7남매(아들 셋, 딸 넷) 중 위에서 두번째였던 엄마는 유독 고집이 세서 딸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단식투쟁을 한 결과 겨우 여고에 입학할 수 있었단다. 학비마련을 위해 집에 있는 쌀을 훔쳐다 팔았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3년을 다 채우진 못하고 중퇴함으로써 결국 중졸로 학력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20대 성인이 된 엄마는 미용기술을 배워 미장원에서 일하다가 군인이었던 아빠를 만났다.
결혼후에도 박봉이었던 월급을 보전하기 위해 미용실에서 일했었고, 이후 내가 어렸을 때 어렴풋이 동네 할머니들에게 뽀글파마를 야매로 해주는 일을 했더랬다. 고등학교때까지 내 머리는 엄마의 미용가위로 다듬어졌고, 내 아이도 초등학교때까지는 외할머니 손에 호섭이머리(앞머리가 일자로 깎인..)로 다녔다.
나를 낳고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에 자궁경부암 초기진단을 받고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그래서 나에겐 형제가 없고, 아빠가 총각때 군생활하면서 모았던 돈을 몽땅 엄마 수술비로 썼기 때문에, 아빠는 엄마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프레임이 있었다.
엄마의 30대와 40대는 특별히 기억나지 않고, 고등학교 내내 엄마와 거의 말을 섞지 않았다.
나는 초, 중, 고등학교 시절을 지나 대학에 가면서 집에서 탈출했다. 그 시기가 지나고 보니, 고등학교때가 나의 사춘기였던 듯 싶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엄마의 관심이 싫었다. 집으로부터, 정확하게 엄마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탈출에 성공했고, 이후 엄마와 같은 집에서 다시 살게 되는데는 내가 아이를 낳게 된 후니까 12년 정도의 공백이 있다. 그 시절 나는 집에 안부전화를 하지 않았다. 나 말고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 기간동안 엄마가 어떻게 살고있었는지 솔직히 잘 모른다.
50대에 엄마는 내 아이를 키워주게 되면서 나와의 동거를 시작했다.
그리고 우울증이 찾아왔다. 그냥 이유없이 마음이 불안하고 잠을 못자고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면 감당할 수 없다는 엄마의 호소를 난 귀담아듣지 않았다. 갱년기 증상일 수도 있고, 잠깐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생각하며 그냥 넘겼다. 현명했던 엄마는 혼자 알아서 정신과를 찾아가 우울증 진단을 받고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무심한 자식으로서 엄마의 고통을 방관한 천벌을 언젠가 받겠지만 엄마에게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각성의 계기였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었고 70대였던 엄마는 집으로 돌아가셨다.
코로나가 터졌고 우울증과 불안을 가지고 있었던 엄마는 집밖을 아예 나오지 않았고 누구도 집에 들이지 않았다. 병원도 못믿는다면서 정신과 진료도 건너뛰면서 불안증은 극도에 달했다. 의사가 자녀인 나에게 전화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때 나는 해외에 있었다. 엄마에게 카톡으로 상태를 묻거나 가끔 영상통화를 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80대를 향해 가는 엄마는 지금 평안해보인다.
내 기억으로, 60대까지 내 엄마는 다소 불안정하고, 상당히 비관적이었으며, 매사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다. 내 아이의 눈에도 그리 비쳤는지, '외할머니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아? 맨날 내가 하는 일에 지적만 하고 칭찬하는 법이 없어.'라고 한탄할 정도였다. 코로나라는 위기가 있었지만 70대 후반부터 무엇이 엄마를 변하게 한 원동력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나와 내 아이가 어릴 때는 하지 않던, 사랑한다, 고맙다, 같은 말들을 아낌없이 하게 되었던 어느 순간부터였던것 같다. 임영웅의 '건행'타령을 가족들에게 하던 시점과 아주 비슷했던 걸로 봐선, 임영웅 효과였을까?
나는 엄마를 좋아하지 않았다. 엄마와 나는 어디선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늘 있어왔다.
내가 학교생활이 힘들다라고 하면, 성질이 못된 탓이라고 쏘아붙였다.
나의 장점보다 단점을 찾기에 바빴다. 칭찬에 인색했고, 비난이 익숙했다.
어린 나에게 엄마는 왜 그랬을까?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가, 나를 알고 싶어서였는데, 그런 나를 비아냥거렸다.
엄마는 자신에 대해 정의해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엄마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고 싶지만, 묻지 않는다. 엄마도 답을 모르는 질문이니까.
엄마의 비난에 더이상 상처받지 않을 만큼 나이든 나에게, 엄마는 이제 칭찬세례다.
역시 엄마와 나는 잘 안맞는다.
엄마도 잘 모르는 엄마를 이해하기는 불가능할 것 같다. 다만, 내가 아는 만큼의 엄마를 반감기없이 잘 기억하고는 싶다. 내가 엄마를 기억하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나는 나에 대해 매일 기록한다. 내 아이가 나를 어떻게 이해하고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단_한_번의_삶 #김영하작가 #엄마에_대한_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