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편의 내연녀, 연진이에게

내 남편의 내연녀, 연진이

by 동은

연진아, 안녕?

사실 너의 이름이 연진이 아니라는 거쯤은 알아.

뒤늦게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를 보고 내가 너의 이름을 새롭게 지어보았단다. 연진아.


네가 나보다 두어 살쯤 더 많다는 얘기는 들었어.

우리가 직접 아는 사람으로 만났다면 내가 너를 언니라고 살갑게 불러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남편의 내연녀였던 너를 언니라고 불러줄 만큼 나는 이해심이 많지 않아.

그러니 이 정도의 반말은 이해하겠지? 연진아.


네가 혹시 그 드라마를 모를까 봐 연진이가 누군지 알려줄게.

연진이는 주인공 문동은의 영혼을 파괴해 버린 그야말로 쌍년이야. 너처럼 말이야.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아주 보기 좋게 복수를 하지.

잔인한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예전 같으면 어떤 장면에선 눈살을 찌푸리곤 했을 거야.

하지만 이번에 난 다르더라.

이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열심히 드라마 주인공을 응원해 본 적이 없어.

드라마 주인공과 이유는 다르지만 그 복수하고 싶은 처절한 마음은 너무나 공감이 됐거든.

너를 철저하게 망가뜨리고 부서지게 하고 싶은 마음.

그래서 쉽게 죽이기도 아까운 그 마음을 말이야.


권선징악이란 말이 얼마나 순진무구한 말인지 알면서도 자꾸 기대하게 되더라.

복수라는 단어가 이렇게 달콤한 것이었나, 달떠서 말이야.

나도 한동안 생각했었거든.

네게 어떻게 복수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야.


난 말이야, 가끔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음을 느껴.

내 자유로움이 타인을 불편하게 할까 봐 미리 걱정을 하고 지나치게 경계했거든.

그래서 잘 모르는 사람은 가끔 내게 말하고는 해.

넌 너무 착하다고.


하지만 연진아.

그건 내가 착해서가 아니야.

다른 사람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 걸 남들보다 더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미리 치는 바리케이드 같은 거였거든.

다치기 싫어서 정성껏 쌓아 올린 나만의 성이었지.

네가 한순간에 무너뜨린 나만의 성, 말이야.


연진아.

덕분에 난 아직도 매일 지옥에 살아.

나를 배신한 남편과 너를 생각하면 낭떠러지로 몰리는 기분이지.

잊기 위해 노력하지만

너도 알까, 연진아?

이건 정말 잊히기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고 아파서 몇 번씩 숨을 몰아쉬면서 나를 진정시켜야만 하루를 살아낸다는 걸.

내가 너의 존재를 알고 난 이후,

단 하루도 너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다는 걸 너는 알고 있을까?


그런데 아쉽게도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아.

상상은 참 많이 했는데도 말이야.

내 상상 속에서 넌 참 예뻐.

당당하고 멋진 커리어 우먼이지.

나와는 달리 자신감도 넘칠 거야.

너는 일을 하면서도 저녁 시간엔 자유롭게 운동을 할 만큼 여유도 있을 테고.

주말엔 가끔 골프 라운딩을 가거나 세컨드 하우스가 있는 곳으로 캠핑을 가기도 하겠지.


너의 세 아이는 네 손을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컸을 것이고

연진이 너도, 네 남편도 경제적으로 풍족했을 거야.

내 상상 속의 너는 부러울 정도로 참 가진 게 많아 보여.


난 가난하고 힘든 유년시절을 보냈어.

나름 노력했지만 내 인생은 그다지 잘 풀리지 않았지.


백마 탄 왕자님이 구렁텅이에 처박힌 것 같은 내 처지에서 나를 구해주는 상상을 해보지 않았던 건 아냐.

가지지 못한 게 많아서 상상하는 건 내게 취미와도 같은, 아주 쉬운 거니까.


백마 탄 왕자님은 아니었지만,

남편은 나란히 걸으며 힘든 인생의 길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었지.

내가 유일하게 경계를 풀었던 남자였어.

내 유일한 친구이자, 버팀목이자, 아이들의 아빠였지.


너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아이는 너처럼 쉽게 가져지지 않았어.

수많은 인공수정, 시험관을 거쳤지.

그 과정의 고생이나 힘듦 따위는 너에게 별로 설명하고 싶지 않다.

설명한들 그 고통에 네가 조금이라도 공감하고 미안해하겠니?

그런 인간다운 감정을 너에게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다고 섭섭해하진 않길 바라.


사실 난 아이 자체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

내가 원한 건 그냥 평범한 '가족'이었는지 몰라.

서로에게 사랑을 주고 아껴주고, 힘이 되어 주는

내가 어린 시절 가져보지 못한 그런 평범한 가족말이야.


그래서 네가 박살 낸 나의 가족은

내게 더 많이 아프고 그렇다. 연진아.



공허해서였을까, 심심해서였을까?

모든 걸 다 가진 듯 보이는 너는

왜 내 유일한 희망마저 가져가려고 했던 걸까.


연진아, 너는 죽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을 이해하려고 애써본 적이 있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건

이해해서가 아니야.

용서해서도 아니야.

숨 죽이고 기다리고 있는 거야.

풀리지 않는 그 결말을.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가끔 너의 부고 소식이 들리길 기대하지만 쉽게 들리지 않더라.

얼굴도 모르는 너를 오늘도 난 온 힘을 다해 미워하고 저주해 본다.


여러 종류의 복수를 생각해 봤어.

너의 자식들에게 너의 부정을 알리는 일?

네 남편과 맞바람을 피우는 일?

네 회사에 알리는 일?


하지만 복수를 예상하고 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복수는,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하고 당한 사람에 비하면

참 쉬운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연진아.

네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 고통만큼 무겁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래서 참 분하고 무기력하기도 해.


난 그저 이 글이 너에게 닿기를 바라.

그래서 매일이 고통스럽기 바라.

나처럼 말이야.

연진아, 난 절대 너를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