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존재를 알고
연진아,
너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하고 괴로워서 지우고 싶은 순간이 있니?
내게는 있어.
6월의 어느 금요일 밤이었지.
아이들을 재우고 거실로 나왔을 때 남편은 무릎을 꿇고 있었어.
내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지.
그 짧은 거리를 어물쩡 시간을 끌며 걸어갔었어.
거실 바닥에 묻은 먼지가 유난히 신경이 쓰인 밤이었지.
돈 문제일 거라고 생각했어.
나 몰래 주식이나 코인을 해서 돈을 좀 날렸나 보다. 하고 말이야.
연진아, 사실 내게 있어서 돈 문제는 그 무엇보다 끔찍한 문제였어.
언제나 돈은 내게 여유가 아닌 생존이었거든.
그래, 액수가 얼마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핀잔 좀 주고 멋지게 넘어가 주자고 마음먹었었어.
나름의 최악을 생각한다고 했던 건데.
여자 문제일 거라고는,
너의 이야기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 연진아.
그동안의 내 삶이 지나치게 평탄했던 걸까?
내가 삶을 지나치게 자만했던 걸까?
난 정말 단 한 번도 내 남편이 외도를 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
인간을 믿지 않는다고 수없이 말하고 다녔으면서도
난 정말로 정말로 단 한 번도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나고 손이 떨린다.
연진아, 그런데 그때의 난 어땠겠니?
듣고 싶지 않은, 알고 싶지 않은 너와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어.
그 이유는 너도 알다시피 남편이 갑자기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가 아니었어.
너의 남편에게 둘의 관계를 들켜버렸기 때문이었지.
내가 어린 두 딸들과 매일을 씨름하는 동안에 나의 남편과 너. 그리고 너의 남편은 꽤 많은 일들이 있었더구나.
나만 홀로 아무것도 몰랐었어.
참 우습지, 연진아?
밤새 울었지만 분노도 슬픔도 사치스러웠어.
내 인생의 반 가까이 함께 한 내 남편과의 시간이
산산이 부서지고 부정당했지.
결혼식 사진을 정말 오랜만에 꺼내보았어.
뽀얀 스물몇 살의 내가 해맑게 웃고 있더라.
견딜 수 없이 내가 미웠어.
너보다도, 내 남편보다도 내가 너무 싫고 미웠어.
결혼앨범을 갈가리 찢고 욕실로 갔어.
사람들이 종종 목을 맨다고 하잖아.
그런데 난 도저히 어디에 뭘 매야 하는지 모르겠더라.
대충 샤워타월을 목에 둘러 매고 온 힘을 다해 목을 졸랐어.
거기까지였어.
난 더 나아가지 못했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노트북을 앞에 두고 너에게 편지를 쓴다.
하지만 연진아. 난 살아있지만 죽었기도 해.
너에게 그날 난 죽음을 당했거든.
누군가 그러더라.
외도는 정신적 살인이라고.
진부한 표현이지?
나도 그랬어. 내가 당해보기 전까지는.
내가 정말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은 몰랐거든.
그날 너에게 전화를 걸고 또 걸었어.
물론 넌 받지 않았지.
내 간절한 부탁의 문자가 통했던 걸까?
수십 통의 연결되지 않은 통화 연결음 소리가 지나서야 너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들을 수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통화가 연결됐는데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게
왜 그랬냐는 울부짖음 뿐이라서 미안해.
너의 내연남의 와이프가 고작 이런 초라한 모습이라니.
실망하진 않았니?
그래도 내 물음에 대답은 해주지 그랬니.
넌 내가 원하는 대답 대신 정리 중이라고 그랬지.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정리라고 할만한 무언가가 진짜로 너와 나의 남편에게 있었던 거구나.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그러면 나는 그 사과를 받아줘야 하는 거니?
이혼을 할지도 모른다는 너의 이야기는
들켜서 짜증 난다는 한탄이었니? 억울함이었니?
그래도 난 그 말에서 희망을 잠깐 봤었어.
연진아. 이혼을 해서 네가 불행하다면 그것보다 내게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니?
난 오늘도 너의 이혼을, 죽음을, 불행을 기도하고 있거든.
내가 그때 네게 말했지. 미안하다고.
내가 미안하다고.
이 일련의 모든 사건이 내 잘못인 것만 같았어.
내가 너무 재수 없는 인간이라 나에게 닥친 불행에 너까지 엮인 거 같아서 그때는 솔직히 조금 너에게 미안했어.
물론 지금은 아니야. 전혀 아니란다.
나는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너는 나를 죽였어.
나는 너를 전혀 모르는데 말이야.
왜 그랬니? 연진아, 왜 그랬니? 나한테 왜 그랬니?
나는 아직도 그 이유가 정말 궁금해.
연진아, 언제가 돼야 나는 그 이유의 답을 들을 수 있을까?
난 아마 죽어서 눈을 감는 순간에도 남편에게 물을 것 같아.
그때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랬느냐고.
이 질문은 너에게도 유효해.
내가 눈을 감는 순간에도 연진이 네게 묻고 싶어.
나한테 왜, 도대체 왜 그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