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남편이 내게 원했던 건
연진아, 그날은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어.
저녁으로 아이들 먹일 김밥을 말고 있었지.
나도 오랜만에 밥을 좀 먹어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단다.
남편은 퇴근해서 집으로 오는 길이었고.
내 속은 엉망이었지만
나는 일단 남편의 말을 믿기로 했었어.
너와의 일이 단 한 번의 후회할 만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다시 단단해지려고 노력했었지.
아이러니하게 남편을 더 사랑해 볼까도 했어.
의식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몸이 그렇게 움직이더라.
잃을 뻔한 아끼던 무엇을 다시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어.
조금은 내 탓을 했는지도 몰라.
아니, 사실 그때 난 아주 많이 그랬어.
맞아. 내 탓을 했었지.
내가 너무 남편한테 무심했었던가.
내가 너무 남편한테 표현하지 않았던가.
내가 너무 자기 관리를 하지 않고 퍼져있었던가.
내가 너무 자만하고 믿었던 건가.
퇴근하고 오는 남편을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던 거 같아.
연진아, 너는 상상이 되니?
자기를 배신한 남자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여자의 비참함이.
네 남편이었어.
모르는 번호 말이야.
아이들이 들을까 방으로 들어가 숨을 죽이고 전화를 받았지.
내가 몰랐던 몇 가지 이야기를 해 주더라.
자신의 속상함과 걱정을 가장한 교묘한 고자질이었지.
내가 알아야 하지만, 그렇게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들이었어.
연진아, 네 남편이 원하는 게 너무 뻔히 보였어.
그래서 원하는 대로 난 무너져줬어.
무너진 믿음 속에서 겨우 버티고 서 있던 내가 바닥 모르고 추락했지.
내가 무너지지 않으면 네 남편이 무슨 짓을 할지 무서웠어.
알겠니? 연진아?
무너지면서도 쓰러지면서도 난 내 남편을, 내 가족을 지키려고 했다는 걸.
그날, 처음으로 남편에게 화를 냈어.
그리고 그 뒤로는 너도 잘 알겠지만 네게 전화를 걸게 했어.
네 남편 때문인지 넌 전화를 받지 않았지.
그래서 전화로 하지 못한 말을 녹음해서 네게 보냈지.
너를 가지고 논거라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자고.
알겠니? 연진아.
네가 한 짓이 너에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넌 그저 내게 아주 아픈 남편의 장난감뿐이었다는 걸.
어떻게 확신하냐고?
아무것도 몰랐던 주제에 너 따위가 뭘 확신할 수 있냐고?
연진아, 그런 넌?
너는 무얼 확신하고 그렇게 나아갔었니?
결국 바스러질 관계 속에서 너는 어떤 확신을 가졌었니?
우린 이렇게 모두 패배했는데.
연진아,
독수리의 수명은 보통 70~80년이라고 해.
그중 40년쯤 되는 시기에 독수리는 높은 산에 올라 스스로 바위에 부딪쳐서 부리와 발톱을 부숴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난대.
그런 다음 40년을 산다고 하더라.
난 40살이 되었지만 나 스스로 바위에 부딪힐 엄두를 내지 못했어.
살아온 세월이 이미 익숙했고, 변화는 두려웠거든.
연진아, 내 부리와 발톱을 부숴 버려 줘서 고마워.
난 이제 많이 달라질 거거든.
예전에 잠깐 내 불안과 우울을 내 나이 때문이라고 감추려고 했었어.
익명으로도 너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지.
애써 너를 배재하고 시간이 흐르면 나의 우울은 사라질 거라고 믿었어.
당연히 지우려고도 해 보고 도망가보려고도 해 봤어.
그게 나를 위한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연진아, 아니더라.
너는 시간이 지나도 또렷했고 매일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어.
밥을 먹을 때도,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남편과 커피를 마실 때도, 운동을 할 때도.
분노로 뒤덮은 얼굴도 모르는 너를 마치 아주 그리워하는 친구처럼 끝없이 생각했어.
그래서 당분간 너를 보내지 주지 않으려고 해.
내 정당한 분노를 너에게 쏟아내려고 해.
그렇게 그렇게 나는 살아가 보려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