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하기
연진아,
왜 내 질책과 원망의 대상이 너였을까?
나를 배신한 건 내 남편인데 말이야.
아마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나 봐.
내 남편이 쓰레기라는 걸.
내가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는 걸.
외도에 있어서 어떤 변명이 필요하겠니?
상대 배우자에 대한 불만? 그로 인한 원인이 있다고?
개소리 집어치우라고 그래.
그딴 게 있으면 애초부터 헤어지고 다시 다른 사람을 만났어야지.
장난이든 호기심이든 재미든 그 무엇이든
외도를 저지른 사람의 인성은 뭘까?
자신의 행동으로 배우자 받을 상처를 생각하지도 못한 머저리 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외면서 지독한 이기주의자이거나
그냥 인간쓰레기 아니겠니?
연진이 너와 내 남편이 외도가 잘못인지 모를 정도로 지능이 낮은 건 아닐 테니
그저 도덕적으로 무감각하고 자제할 줄 모르는 짐승과도 같은
내가 정말 혐오한 그런 부류의 인간이겠지.
난 내 남편이 그런 인간이란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나 봐.
그래서 내 남편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너에게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원 가족이 내게 그다지 안정적이고 평온하지 못했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마음을 둘 사람이 없었지.
남편은 내가 원 가족에게서 바라던 것을 의도하지 못한 채 제공해 줬고
난 내 결핍을 채워주는 듯한 착각을 했나 봐.
그때부터 나는 남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의지했어.
나의 안전한 애착기지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외면했었어.
'이건 아닌데'라는 내 남편의 수많은 모습들을.
고통 속에서도 예전에 내가 애착을 느끼고 사랑을 느낀 그 환상을 놓지 못했지.
연진아,
이제 알겠어.
내 남편은 내가 생각했던 만큼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나는 이 일을 겪고도 외면하려고 했단다.
나를 바꾸려고도 해 보고.
아무 의미가 없는 짓이었지.
남편은 잘한다고 했고, 실제로도 잘하고 있어.
그런데 그걸로 보상이나 용서가 될까?
연진아,
너의 아이를 해친 사람이 너한테 잘한다고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겠니?
평생 용서하지 못할 원망과 미움을 품고 또 사랑해야 하는 이 모순된 상황 속에
내가 자아분열 상태에 빠지지 않고 그저 우울증에 시다릴 정도면 오히려 다행이지 않니?
죽고 싶었어.
남편과의 이별을 상상하지 못하고 그냥 내가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만큼 내가 내 남편에게 의존적이었나 봐.
그래, 인정할게.
나는 홀로 서야 한다는 걸.
잘못 맺어진 관계를 다시 설정해야 한다는 걸.
그래서 잠시 내가 다시 외로워지더라도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