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분을 만난 건 고등학교 들어가서였다.
그분과의 가까운 만남은 아마도 고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한다.
한 번은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놀러 오라고 하셨다.
친구들 대여섯 명이 주말에 그분 집으로 놀러 갔다.
서울 시내 연립 주택으로 그리 크지 않은 집이었다.
그분에게는 두 딸과 사모님이 있었지만 그날은 아무도 없었다.
그분은 우리에게 라면을 손수 끓여 주셨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던 시절, 우리는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고 있었다.
그분은 그런 우리를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고만 있었다.
같이 드시자고 해도 손사래를 치셨다.
정신없이 라면을 먹고 있는 우리에게 그분은 물었다.
“저기 장롱 이불 사이에 뭐가 있는 줄 아나?”
“...?”
“로진...”
“로진이 뭐예요?”
“... 진로...”
“아...”
“한잔씩 할 텐가?”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그 당시 나와 친구들은 사실 담배며 술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차마 선생님 앞에서 술을 먹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분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알고 계셨던 것 같다.
보통의 어른이라면 학생이 술, 담배를 한다며 야단을 치시거나 타이르게 마련인데 그분은 그러지 않았다.
특히 내게 더 많은 관심을 보이셨다.
어느 날은 내게 그분의 회사로 놀러 오라고 하셨다.
친구 한 명과 함께 토요일 오후 그분이 알려준 곳으로 찾아 같다.
우리가 간 곳은 서울의 모 의과대학 연구실이었다.
그 당시 전국에 단 두 대 밖에 없다는 1톤 트럭 크기의 전자현미경실이 그분의 사무실이었다.
그분은 의과대학 연수소장쯤 되시는 것 같았다.
하얀 의사 가운을 입은 그분은 의과대학의 각종 연구실과 실험실을 구경시켜 주셨다.
의대생들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는 연구시설을 자세히 관람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필 그날 오후 의과대학교 축제가 있는 날이어서 나와 친구는 의대생들로 구성된 그룹사운드의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공부만 하는 의대생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노래도 연주도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그날 처음으로 "나도 대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공부 따위는 포기한 지 오래고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만 있어도 다행이었던 내게 대학이라는 문이 활짝 열리는 날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분은 종로에서 지하철을 내려 통닭을 사주셨다.
맛있게 통닭을 먹고 있는 우리에게 그분이 물으셨다.
“맥주 한잔 할까? “
그날도 정중히 거절했지만 그분의 배려와 사랑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에서는 문제아로 낙인찍혀 징계를 받는 등 방황을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술, 담배, 싸움, 가출...
세상을 살다 보면
가르치려는 사람은 많지만
안아주려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분은 단 한 번도 담배를 피우지 말라거나 술을 먹지 말라거나 바르게 살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나는 얼마 후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그분의 길을 뒤쫓아 살았다.
나뿐 아니라 그 당시 문제아 친구들 역시 그랬다.
방황하며 인생을 낭비하며 살던 내게 그분은 이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제와 내 자식이나 젊은이들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인지도 모른다.
“시간은 짧다. 인생을 멋있게 살아라."
그분은 그 당시 마을 한 교회의 교회학교 선생님이었다.
지금은 그 교회의 장로님이 되셨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 당시 교회 아이들 데리고 다니며 술 사준다고 교인들에게 손가락질을 많이 받으신 걸로 안다.
불량청소년 몇 명을 위해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하셨는지...
돌아보니 너무 그립고 감사하다.
이 은혜를 무엇으로 다 갚을까.
"선생님, 저 선생님의 바람대로 정말 열심히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겠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