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
어느 날 학원 상담실로 할머니 한분이 들어오셨다.
학원은 젊은 학부모님들이 오게 마련이라 할머니는 낯설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뭐 좀 물어보려고요.”
“예 말씀하세요.”
잠시 머뭇거리던 할머니는 말을 이어갔다.
“여기 학원비가 한 달에 얼마나 해요?”
“예, **원이예요.”
또 한참을 망설이시던 할머니가 다시 말했다.
“우리 손녀가 하나 있는데 학원비 좀 깎아줄 수 있수?”
“얼마나...?”
“내가 박스 주워서 먹고살아요. 좀 깎아 주구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했다.
“그럼 절반이면 되겠어요?”
“아이고 그러면 고맙지요.”
사연을 들어보니 할머니의 손녀는 부모와 인천에 살았었는데 얼마 전 부모가 이혼을 하고 아이마저 돌보지 않고 여기 수원의 외할머니에게 떠넘기고 연락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손녀를 학원이라도 보내고 싶은 할머니 마음이었다.
다음날 오후, 얼굴이 햇볕에 검게 그을리고 깡마른 중학교 여학생하나가 상담실로 슬그머니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반가워, 근데 넌 누구니?”
“우리 할머니가 학원에 돈 냈다고 오늘부터 다니래요.”
중학교 2학년 경희는 처음부터 천연덕스럽고 거침이 없었다.
사실 할머니는 아직 학원비를 내지 않았지만 나는 웃는 얼굴로 경희와 상담실에 마주 앉았다.
“학원 다녀본 적은 있니?”
“아니요, 인천 살 때 학교 육상부만 해서 공부는 몰라요.”
햇볕에 그을린 경희의 얼굴이 까만 이유가 있었다.
어찌 되었건 절차대로 수학, 영어 입학고사를 보았다.
수학, 영어 모두 0점이었다.
심지어 영어 소문자조차도 정확히 알지를 못했다.
내가 경험한 최악의 학생이었다.
가장 레벨이 낮은 반에 편성했지만 그마저도 따라갈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할머니는 며칠 후 봉투에 돈을 넣어서 절반의 수강료를 내셨다.
하루는 경희가 상담실로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 저 영어단어 외우는 게 잘 안 돼요.”
“하루에 몇 개씩 시험을 보지?”
“20개요.”
“넌 하루에 몇 개나 외우니?”
“3개요”
“야, 그건 좀 심하네. 노력부족 아니야?”
“아니에요, 어제 밤새서 외웠어요. 3개”
“그러면 내일은 5개에 도전해 봐.”
“5개는 너무 어려울 것 같은데요.”
“너 달리기 잘하지.”
“그럼요, 그건 제가 전교 1등이죠.”
“야 운동 잘하는 애들이 머리도 좋은 거야.”
“진짜요?”
“그럼, 머리가 나쁜데 어떻게 운동을 잘하냐. 머리가 좋으니까 몸도 잘 움직이는 거거든.”
“알았어요 선생님. 해볼게요.”
나는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는 말로 아이에게 사기를 치고 있었다.
또 어느 날 경희가 상담실로 나를 찾아왔다.
“경희 안녕, 단어는 잘 돼 가니?”
“예, 단어는 이제 30개도 외워요.”
“와~대단한데.”
“근데 영어 문법은 하나도 이해가 안 돼요, 수학은 포기고요.”
기초가 너무 없는 경희에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근데 경희야, 어차피 공부는 암기거든, 넌 머리가 좋으니 다 외워버려.”
그리고 불과 1년이 못되어 경희는 전 과목 평균 만점에 가까운 전교 1등을 거머쥐었다.
“와~ 경희야, 너무 대단한걸. 네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전교 1등이 될 줄이야.”
“근데 선생님 아직도 하나도 이해는 안 돼요. 무조건 외웠어요.”
부모, 환경, 배경.
이런 것 들은 학생의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건 교육 전문가들이 할 이야기고 나처럼 현장에서 학생과 구르는 사람에게는 먼 이야기일 뿐이다.
다만 아이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다.
믿어주고
지지하고
칭찬하고
격려하면
더디더라도 반드시 아이는 자기 안의 폭발적은 능력을 꺼내기 시작한다.
공부, 그게 별 건가.
하면 된다.
좋은 부모 만나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아서 좋은 대학 가고 다시 그런 부모 같은 인생을 산다.
나쁜 부모 만나 나쁜 환경에서 나쁜 교육을 받아도 좋은 대학 가고 부모보다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는 그런 사회가 좋은 사회 아닌가?
아이가 선택하지도 않은 나고 자란 배경이 아이의 인생을 결정짓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우리 어른들이 그러지 못하도록 세상을 바꿔가야 한다.
지난 30년, 내가 학생을 가르친 이유이며
앞으로 남은 생을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경희의 추억은 벌써 10년도 더 되었다.
녀석은 아마도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었을 것이다.
경희야, 잘 지내지?
너는 진정 멋진 아이였어.
네가 어디있건 너의 빛나는 삶을 응원할게.
혹시,
이건 진짜 혹시인데
네가 언젠가 결혼을 한다면
그래서 주례가 필요하다면
내가 해주고 싶구나.
브라보.
유어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