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 금지]를 금지함
낙 서 권 장
나는 시간이 날 때면 학원 빈 강의실에 들어가 이 책상, 저 책상들을 오가며 책상 위와 강의실 벽에 온갖 색깔과 글씨채로 휘갈겨 놓은 아이들의 낙서를 살피곤 한다.
바쁜 스케줄 속에 나는 늘 아이들과의 대화에 목말라 있다.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쉴 새 없이 문제만 풀어주는 직업병이 돋는다.
아이들의 낙서는 한 아이 한 아이의 마음과 고민들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통로다.
온갖 고민과 갈등의 껍질들을 녀석들은 무수히 떨구어 놓고 간다.
숱한 낙서들을 보며 나는 어느덧 아이들과 대화하듯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아이들이 정작 내게 알고 싶었던 것은 일차방정식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조언이 아니었을까.
아이들이 만나고 싶은 것은 무뚝뚝한 강사가 아니라 가슴이 따듯한 인생 선배가 아니었을까.
도화지처럼 껄끄럽고 하얀 강의실 벽은 연필로 낙서하기 안성맞춤이고,
번들거리며 매끄러운 책상은 유성팬이나 사인펜, 더러는 화이트로
선명하고 굵게 낙서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낙서의 내용은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중 가장 많은 것은 친구에 대한 비방과 욕설이다.
“*** 너 정말 재수 없더라.”
“*** 너 ### 가 학교에서 죽인대.”
특이한 것은 여학생의 글씨체가 많다는 것이다.
사춘기 학생들은 화합과 이해보다는 질투와 비방을 먼저 배우고
상대방을 밟고 일어서야 한다는 의식이 그대로 배어 나오는 것이다.
상대방이 굳이 나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 않았다 해도 상대가 나보다 돋보이거나 우수하다면 박수보다 질투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둘째로 많은 내용은 유명 탈랜트의 이름이나 값비싼 유명 브랜드의 상표다.
자신이 넘을 수 없는 한계 앞에서 유명한 대상들은 우리 아이들이 잠시동안이나마 이 답답한 강의실에서 꿈꿀 수 있는 이상향이요 반항심인지도 모르겠다.
꽉 짜인 시간표와 수학책 저 너머로 어렴풋이 만져보는 자유.
바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돌고래는 야생에서 40~50년을 살지만 수족관 안에서는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채 7년을 못 산다고 한다.
돌고래에게 좋은 온도, 좋은 먹이, 안전한 환경이 자유보다 더 행복할 수 없었나 보다.
아이들의 영혼의 수명은 얼마나 줄었을까.
그리고 세 번째로 많이 볼 수 있는 낙서는 남자와 여자의 성기를 어설프게 그려놓은 낙서다.
아마도 아이들의 부모님들이 이 낙서를 본다면 놀라고 민망해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뭐 그리 놀랄 일인가.
사춘기.
정신적, 육체적 변성기에 훌쩍 커버린 자신의 몸과 남의 몸의 새로운 것들을 보고 느끼는 것이다.
어느 날 초등학교 6학년 강의 시간에 남학생에게 내가 물었다.
“준호야, 넌 왜 며칠 동안 결석을 했니?”
그러자 저 뒤쪽에서 덩치가 크고 변성기가 되어가는 남학생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선생님, 준호 포경수술 했대요~”
순간 남학생들은 책상이 부서져라고 두들겨 대며 웃어대고
여자 아이들은 얼굴이 붉어지며 난처해했다.
산만해진 분위기를 잡기 위해 내가 말했다.
“사춘기가 되면 남자는 포경 수술을 하고 여자는 생리를 해. 당연한 걸 가지고 유치하게 굴지 말고 책펴!”
태연하고 당당한 나의 태도에 아이들은 마치 어떤 커다란 비밀을 누설당한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힐끔거리며 멋쩍게 책을 폈다.
어쩌면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이 당연히 알아야 할 것들까지도 굳이 덮어버리려 하지는 안는지.
그런 속에서 우리 아이들은 어쩌면 진정으로 보지 말아야 할 것, 알지 말아야 할 것까지 들추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두 살배기 우리 딸 세영이는 내가 커피를 마시면 뜨거운 커피잔을 만지고 싶어 한다.
그럴 때면 아이의 손가락 끝을 커피에 살짝 담근다.
뜨거워서 질겁을 하며 제 엄마에게 도망가 버린다.
세영이는 안다.
김이 나는 것과 아빠가 “아 뜨거”라고 말하는 것은 아프다는 것을.
알릴 것은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려주고 깨닫게 해야 한다.
원장님은 낙서 지우는 약품을 들고서 강의실의 벽이며 책상을 애써 지우곤 한다.
한참을 그런 고생을 하고서는 내게 이야기하곤 한다.
“애들이 낙서 못하게 주의 좀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지만 나는 속으로 말한다.
“아이들의 마지막 비상구마저 닫고 싶지는 않아요.”
어떤 아이는 장래희망을,
어떤 아이는 욕설을,
어떤 아이는 멋진 그림을.
책상은 누가 뭐래도 학생들 물건 아닌가.
책상 위에 낙서할 자유를 뺏을 권리가 누구에게 있단 말인가.
낙서 속에 꿈이 있고 자유가 있고 더러더러는 아이들의 눈물 자욱이 있다.
원장님께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낙서하는 아이들과
지우는 원장님의 수고가 오래도록 끝나지 말기를.
말과 글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통제하려 하거나 흐르지 못하게 막으면 썩게 마련이다.
물이 썩으면 더 이상 물고기는 오지 않는다.
말과 글은 개인일 때 "의견"이 되고,
다수일 때 "여론"이 된다.
선생님이나 어른이 보기에 불편한 내용일지라도 자연스럽게 흐르게 해야 한다.
언젠가 선생님인 나를 욕하는 낙서를 발견하고는 적잖이 마음이 상한 때가 있었다.
무척 억울하고 분했다.
"아니, 어떤 놈이지?"
나는 그 자리에 앉는 녀석의 노트를 이용하여 범인(?)의 필체를 찾는 데 성공했다.
그날 이후 나의 반격은 시작되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녀석을 티 나지 않게 칭찬하고 간혹 슬며시 간식도 챙겨주었다.
거의 1년이 지나던 어느 날, 녀석은 슬며시 자기가 먹던 과자 봉지를 내게 내밀었다.
"넌 도대체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처먹니?"
아이가 어른의 말을 이해하고 듣기를 바라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난센스다.
마치 구구단도 모르는 아이에게 미적분을 가르치려는 것과 다름 아니다.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아이와 같은 게임을 이야기하고
아이가 좋아하는 불량식품을 함께 먹어야 하며
아이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노래를 함께 불러야 한다.
아이가 어른의 말을 듣기를 애쓰지 말고
어른이 아이의 말을 듣기를 애써야 한다.
그러고 나서 당당하게 아이에게 말하라.
"공부해, 목숨 걸고."
아이는 스스로 공부하거니와
전교 1등이 되는 데는 단 하루면 족하다.
공부, 아주 쉽다.
그러나 억지로는 안 된다.
아이는 꽁치 몇 마리로 길들일 수 있는 돌고래가 아니니까.
추신) 혹자들은 낙서를 연습장에 하면 되지 왜 굳이 책상이나 강의실 벽이어야 하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낙서란,
하지 말아야 할 곳에 해야 더 낙서답지 않을까?
누가 뭐래도 역시 낙서는 낙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