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곡은 처음이라

벤 <갈 수가 없어>

by 정상권
벤 <이번 생은 처음이라(tvN 월화드라마) OST - Part.8> [사진출처] Bugs



방 안을 한가득 채워놨었던 꿈들이

한 장씩 의미를 잃어가서 바래졌어

지난날을 빼곡하게 적어놓은

작은 종이들에 이제는 멍해지기도 해

다른 내일들을 바라보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아서 손댈 수도 없어


오늘처럼 하루를 참아도

자꾸 되돌아오는 매일을 살고

바보 같은 일을 반복하고

혼자 또 한 켠에 서서

정말 혹시나 내일은 다를까 봐

한 걸음도 갈 수가 없어


언젠가 써놓은 이루려던 미래들이

아직은 그 시간에 머물러 멈춰있어

가끔씩은 어렸던 날이 그리워

다시 그날 앞에 닿으면 웃을 수 있을까 봐

같은 시간들을 반복하는 일이

어느새 익숙해져서 그렇게 지나가고 있어


오늘처럼 하루를 참아도

자꾸 되돌아오는 매일을 살고

바보 같은 일을 반복하고

혼자 또 한 켠에 서서

정말 혹시나 내일은 다를까 봐

한 걸음도 갈 수가 없어


잠시라도 괜찮을 나를 그려봐

한 편의 영화 같은 어떤 날을 난


오늘처럼 하루를 참아도

자꾸 되돌아오는 매일을 살고

바보 같은 일을 반복하고

혼자 또 한 켠에 서서

정말 혹시나 내일은 다를까 봐

한 걸음도 갈 수가 없어


Written by Man Sik Seo / Myung Hyun Kang



발라드 가수들은 이별노래가 많다. 백지영, 거미, 이소라 등은 물론이고 벤이나 이예준, 신예영, 김나영 등 소위 요즘 세대에게 통하는 발라드 가수들도 이별노래가 유독 많다. 가사가 슬픈 경우도 많지만 멜로디가 서글퍼서 이별노래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많다. 이별을 포함한 사랑을 테마로 하는 노래들이 가장 많은 것은 당연하다. 대다수가 공감할 법한 보편적인 감정이며 실제 우리는 그 곡을 들으며 실제로 동기화되는 체험을 겪는다. 그만큼 사랑과 무관한 대중음악을 찾기는 생각보다 힘들다. 발라드면 더 희귀하다. 벤이 가장 사랑받았던 노래들도 그러한 이별노래들이다. 이별을 통보한 연인에게 오늘만 같이 있어달라고 애원하는 <오늘은 가지마>, 공식적인 이별을 했지만 화자는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열애중>, 사랑의 처음과 끝이 너무나도 달라졌다는 <180도> 같은 노래들이 아마 떠오르리라. 그러다 보니 가사에 주목하고 있지 않다면 모든 곡들을 이별이나 사랑노래로 간주하게 된다. 이 곡도 나에게 그렇게 들렸었다. <갈 수가 없어>라는 제목은 <신촌을 못가>처럼 사랑하지만 너에게 갈 수 없는 자신이 처해진 현실에 슬퍼하는 말 같았다.


처음 곡을 접한 것은 2017년, tvN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 작품 속 장면에서였다. 작중 남녀는 금전적인 이유로 주거공동체라는 형태로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그렇게 함께 살다가 감정이 메마른 두 남녀가 점차 사랑을 느끼고, 잠시 동안의 단절을 경험하지만 다시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그러한 전형적인 로코의 순서도를 충실히 지키고 있다. 멜로서사의 줄거리는 이렇게 뻔하지만 사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드라마는 청춘을 그리고 있다. 모두가 이번 생은 처음이고, 서툴거나 늦어도 괜찮다고 위로를 건네는 그런 휴먼드라마다. 이 노래도 그러한 맥락에서 청춘을 담고 있다.


극 중 정소민이 분한 윤지호라는 인물은 드라마 작가 지망생이다. 문학을 좋아했고 글을 쓰고 싶은 막연한 꿈을 품고 인문대에 진학한다. 일일드라마 보조 작가로 일하며 꾸준히 공모전에 출품하지만 번번이 떨어진다. 자신의 나이는 어느덧 서른이 되었고, 방 한 칸도 제대로 구할 수 없는 현실은 그녀를 좌절시켰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현실은 나아지지 않는 것 같다. '방 안을 한가득 채워났었던 꿈들'은 수 없이 써 내려가던 원고지들일 것이고, 당선되지 않은 작품들은 '한 장씩 의미를 잃어가서 바래졌'다. 결과의 성패여부가 곧 의미이므로. 그녀는 서른이 되면서 아무리 내 것이 아닌 것에 욕심내지 않고 살더라도 보조작가의 월급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애써 쳐다도 보지 않았던 다른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다른 내일을 바라보는 일'은 새로운 직업을 찾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그동안 자신이 해오던 노력의 실패를 인정하는 행위와 같다. 그러므로 아무리 명문대를 나오고 이성적으로는 매몰비용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고 두려워하며 '손댈 수도 없'을 것이다. '정말 혹시나 내일은 다를까 봐 한 걸음도 갈 수가 없어'라는 가사는 그러한 불안한 청춘의 마음을 관통하는 말이다. 아무리 '바보 같은 일을 반복하고'있다는 것을 느끼지만, 혹시 하는 기대에 그 같은 매일을 산다. 쉽게 다른 일을 모색할 수가 없다. 정말로 갈 수가 없다.


화자는 이 노래에서 적어도 어떠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노래가 끝날 때까지 방황한다. '어렸던 날을 그리워'하며 과거에 빠지기도 하고, '한 편의 영화 같은, 괜찮을 나를 그려'보며 미래를 희구하기도 한다. 현재를 성실히 살면서도, 과거와 미래라는 도피처를 잠시 찾아 머물곤 한다. 방황에는 보편적인 정답은 없기에 결국은 헤세의 <싯다르타>처럼 본인 스스로가 깨닫고 그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언젠가는 답을 찾아야 하지만 이 드라마와 이 노래는 모두가 그런 시기가 있다며 세대의 동기화를 통해 위로한다. 어찌 됐든 모두가 이번 생은 처음이니 말이다. 답이 무엇이라고 정해주는 것은 조언이 아니라 때론 폭력이 될 수 있고, 보편적인 척 위장하는 정답은 전체주의를 낳는다. 우리는 많은 경우 객관적인 조언보다 정서적인 위로가 필요하다.


벤은 시원하고 길게 뻗는 고음으로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온 가수다. <갈 수가 없어>는 그런 벤의 노래 중 가장 낮은 노래다. 이별의 감정은 강력하고 과잉되어 있는 데에 반해, 무기력과 불안, 자괴감 같은 감정은 무겁고 또 섬세하다. 그러한 무거움과 섬세함이 낮은 음역대를 요했다. 이 곡은 전주 없이 벤의 들숨으로 시작한다. 속삭이듯이 겨우 남은 에너지로 내뱉는 첫 소절은 벤과 윤지호라는 가상의 청년을 단숨에 동기화시키는 조용하지만 강력한 위력을 가진다. 드라마 속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드라마를 보고 있는 당시 중학교 3학년의 내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음악은 이렇게나 힘이 세다.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 때, 갈 수가 없는 그 시절을 나는 음악을 통해 갈 수가 있다. 이별노래처럼 느꼈던 그 시절은 나는 이렇게나 자라 윤지호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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