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내는 이유가 아니라, 화내는 때가 있다

우리는 이성적 존재가 아니다

by 은도정신과

저는 일본어 공부를 위해 가끔 일본어로 된 기사를 찾아보는데요, 최근에 접한 날씨 기사가 정말 흥미로웠어요. 내용인즉슨, 기압이 낮아지면 두통, 목과 어깨 결림, 현기증, 전신 불쾌감, 관절통 같은 다양한 신체 증상이 생길 수 있고, 이럴 때일수록 수면과 식사에 더욱 신경 써야 한다는 거였어요. 기압이 낮아지면 혈관이 확장되어 두통이나 편두통이 생기고, 관절 내부의 압력 불균형으로 통증이 발생한다고 하더라고요. 예전에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날씨가 안 좋으면 팔다리가 쑤신다고 하셨던 말씀이 과학적인 근거가 있었던 거예요.


신기하게도 그 기사를 본 날, 진료실에서 한 환자분을 만났는데 "특별히 스트레스받는 일도 없었는데 갑자기 우울감과 두통이 생겼다"고 호소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날 기압을 찾아보니 우리나라도 기압이 떨어져 있었어요. 그 일을 계기로 기압 저하와 기분 변화의 연관성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게 됐습니다.


알아보니까, 기압이 낮아지면 보통 날씨가 흐려지면서 햇빛이 줄어드는데요, 햇빛 감소는 이른바 '행복 호르몬'이라 불리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의 생성을 저하시켜 우울감이나 무기력감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어요. 어떤 연구에서는 낮은 기압이 충동적인 행동이나 응급 정신과 방문 증가와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연관성이 있다는 걸 발견하기도 했고요. 쥐를 대상으로 한 동물 실험에서 기압을 낮추자 우울증과 유사한 행동이 증가하는 현상이 관찰되었다고 해요. 낮은 기압은 신경계를 미묘하게 자극해서 불안이나 스트레스 수준에 영향을 미치는데, 특히 자율신경계 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에게는 그 영향이 더 두드러질 수 있다고 합니다. 기압 변화와 기분 사이에 직접적이고 강력한 상관관계를 증명하는 연구는 없었지만, 수많은 연구들이 기압이 기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어요.


제가 20년 넘게 외래 진료를 하면서 정말 신기한 건 봄과 가을에 환자 수가 늘어나는 거였어요. 날씨가 좋은 계절인데 왜 환자가 늘어날까 미스터리였는데, 기압이 한 요인이 되지 않을까 짐작해 보게 됐어요. 여름과 겨울에는 한반도를 지배하는 대규모 기압 시스템이 자리를 잡아서 기압이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되는 데 반해, 봄과 가을은 이동성 고기압과 저기압이 자주 나타나면서 기압 변화가 빈번하고 날씨가 급격히 바뀌거든요. 그런 요인들이 기분에 영향을 미쳐서 우울증도 많아지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이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단 하나예요. 우리의 기분 상태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너무나도 다양한 요인들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걸 다시 한번 되새기고 싶어서예요. 우리는 스스로를 이성적 존재라고 믿고 싶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수면이 부족한 것만으로도 기분이 바닥을 칠 수 있고, 배가 고플 때조차 우리는 날카로워지잖아요. 여기에 호르몬의 변화, 햇빛의 양, 그리고 이 거대한 대기가 만들어내는 기압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요인들까지 가세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그 원인을 주변 환경이나 주변 사람에게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어요. 이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엉뚱하게 피해를 보기도 하고,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어내기도 하죠.


예전에 읽었던 하루키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었어요. 화내는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화내는 때가 있다고요. 아마도 그 '화내는 때'는 기압이 낮아지고, 햇빛이 부족하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조건들이 우리의 자율신경계를 흔들어 놓는 바로 그런 순간이 아닐까요. 타인을 탓하기 전에 그날의 기압을 체크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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