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그림

류민효라는 사람이 그릴 수 있는

by 류민효

나는 깊이가 있는 사람이 좋다. 책을 읽든, 혼자서 생각을 하든, 그림이나 영화나 다른 매체를 통해서든 자신의 내면에 무언가를 쌓아가고, 무너지고, 다시 쌓아가면서 자신만의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 좋다.

그러면서 동시에 가벼울 줄 아는 사람이면 최고 좋다. 자신만의 것에 빠져서 타인의 것을 접할 때 자신의 것을 뒤로하지 못하는 건 무겁다. 그치만 가벼워지려면 무거울 줄 알아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생각 없어 보일 수 있어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좋다. 내가 가진 깊이를 누군가에게 증명할 필요는 없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고 표현하고 싶은 것이 많다. 나누고 싶은 대화 주제도 많고, 정말 궁금한 것도 많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온전히 주고받을 수 있는 대화를 하는 방법을 모르기도 하고, 할 기회도 없었고, 없고,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예전엔 그걸 다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게 슬플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원래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한 사람의 모든 세상을 다 받아줄 타인이 있을 수 있을까.

하고 싶은 말이 많고 그걸 누군가 알아줬으면 좋겠지만 동시에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고집스럽게도, 구구절절 설명하는 건 구차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거 아니냐고 말해준 사람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그 말이 맞다. 말로 다 못하는 그것들을 애매모호한 방식으로, 그렇기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어서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


나는 모든 예술은 시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구절절 설명하는 건 시가 아니고, 그건 예술이 아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시에 깊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깊이가 있지만 가벼울 줄 아는 것도 어쩌면 시가 되기 위한 특성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는 분명 단순한 면이 있다. 어쩌면 순수하다고도 할 수 있고, 어쩌면 애 같다고도 할 수 있다. 분명히 그런 부분이 나에게 있고, 특히 그림을 그릴 때처럼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는 그런 모습이 더 쉽게 드러난다.

그래서 내 그림은 단순한 형태와 단순한 색으로 표현되는 것 같다. 누군가는 다른 색도 써보라고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그 색이 가장 적절하다. 단순한 색을 쓰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큰 이유는 없고, 그 색들만으로도 충분해서라고 답했을 때 그게 중요한 이유라고 했던 분도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다. 내가 원하는 걸 표현할 수 있는 색은 적어도 지금은 붉은색 중에서 가장 빨간색 같은 빨간색과 누런색 중에서 가장 노란색다운 노란색 같은 단순한 색이다.


그렇게 단순한 색들에 내가 가진 깊이를 담아내는 게 가장 나다운 그림인 것 같다. 가벼운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깊이가 있는 그런 그림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좋은 그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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