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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입장료는 이미 누군가 계산했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드 영 뮤지엄

# 뚜벅이는 샌프란시스코 길거리가 무섭다.     


일주일간 신세를 진 허츠 렌터카를 반납했다.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에서는 뚜벅이가 좋겠다고 판단했다. 고공행진 중인 유류비와 하루에 약 20~30달러 사이의 시내 주차비가 걸림돌이었다. 호텔 주차장은 굳건한 철창이 있어 믿음직스러웠지만, 시내 퍼블릭 주차장 가격의 두 배 이상이다. 허츠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지점에는 역시나 파손된 차량이 눈에 띄었다. 유리창이 깨지지 않은 채 온전히 돌려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어느덧 밤 9시, 공항에서 다운타운으로 들어가야 했다. 

지하철보다는 택시를 타기로 했다. 10시에 문을 닫는 일본 라멘집에 가기 위해서였다. 점심, 저녁을 내리 못 먹었더니 온몸에 힘이 없고 속이 쓰렸다. 라멘집은 숙소에서 겨우 다섯 블록 떨어져 있었다. 구글 맵은 라멘집이 ‘평소보다 덜 혼잡’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택시에서 내리니 라멘집 앞에는 이미 줄이 쫙 늘어서 있었다. 친구끼리, 커플끼리, 모녀지간에 사이좋게 나온 가족도, 홀로 야식을 먹으러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길거리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것은 방탄복을 빼앗기고 맨몸으로 전쟁터에 등 떠밀린 것과 비슷하다. 식당 문 앞에 줄을 서는 건 당연하게도, 거리에 가만히 서 있는 모양새다. 낯설고 어두운 외국의 길거리에서 가만히 서 있는 행동은 안전하지 않다. 옛날 19세기 영국에서는 여성이 길거리에서 잠시 코라도 풀려고 멈춰 서면 매춘부로 오해받을 수도 있었다. 식당에 들어가겠다는 동일한 목적을 가진 많은 사람과 함께일지라도, 그저 서 있는 것이기도 하다.   

   

줄을 서서 기다리길 20분. 지나가는 수상한 행인들이 말을 걸었다. 

나는 ‘말 걸기’를 당하지 않으려고 몸을 돌렸다. 길거리에서 고개를 돌리니 큰 유리창이 있어 내부가 훤히 보이는 식당이었다. 뜻하지 않게 타인이 식사하는 장면이나 실컷 구경하게 되었다. 가장 인기 있는 메뉴가 무엇인지 주문한 개수를 세기도 했다. 덕분에 알아듣지도 못하겠는 이상한 대화로부터 빠져나올 수는 있었지만, 그건 더욱 위험한 행동일 수도 있다. 무방비한 상태로 그들에게 등을 노출한 셈이었으니까.      


대기시간이 길어지자 동행인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미국인들 진짜 너무하네. 밖에 이렇게 줄이 긴 게 빤히 보이는데 일어나지를 않아. 여기 테이블은 식사를 마친 지 오래됐는데 계속 앉아서 대화만 하고 있어. 저기 테이블은 라멘 한 그릇 비워놓고 계속 맥주만 시키네. 나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방금 맥주를 또 시켰거든…. 어쩔 수 없다고 다독였지만, 내심 식당의 손님들에게 섭섭한 건 마찬가지였다. 영업시간은 이제 겨우 15분 남았다. 길거리를 보면 부랑자와 눈이 마주치고, 식당 안을 보자니 손님에게 서운한 상황이었다.  

   

드디어 자리에 앉았다.

식사를 마친 테이블은 서버에 의해 모두 가게에서 쫓겨나갔다. 맥주를 추가 주문하던 테이블도 어느 순간 제지당했다. 알고 보니 이 식당에는 1시간으로 식사시간이 제한되어 있었다. 오래 기다린 만큼 라멘을 맛있게 먹어보자, 하고 메뉴를 본 순간 사기당한 기분이었다. 유리창에 붙은 메뉴의 가격과 식당 내부에서 QR 코드로 접속해서 본 메뉴의 가격이 달랐다. 메뉴 하나당 몇 달러씩 가격이 인상되었다. 서비스 차지까지 자동으로 붙으니 라멘 하나에 30달러를 훌쩍 넘었다. 일본이었다면 천 엔도 안 했을 라멘을, 왜 샌프란시스코에서 35달러나 주고 사 먹고 있는 거지? 무언가 억울했지만 결제를 마친 후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라멘을 입안에 욱여넣으며 텁텁한 입맛을 쓸어냈다.     



# 매주 토요일, 샌프란시스코 베이 거주자는 무료입니다.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의 씁쓸함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자동차를 반납한 이유가 무색하게도 계속 우버를 찾게 되었다. 애초에 이곳에서 뚜벅이는 좋지 않은 생각이었다. 샌프란시스코는 작은 도시지만, 걸으려고 하면 생각보다 크고 경사도 가파르다. 무엇보다도 길거리 곳곳이 노숙자들의 캠프 그라운드였다. 어떤 길은 지나가기 위해서 노숙자들 무리 한가운데를 가로질러야만 했다. 케케묵은 암모니아 악취와 그들의 생활공간 깊숙한 곳을 침범하게 된다는 눈치가 문제였다.

    

우버 비용이 너무 많이 들자 샌프란시스코 체류 3일 만에 결단을 내렸다. 

그냥 몸으로 부딪쳐야겠다. 대신 걷지 않고 뛰어다니면 괜찮지 않을까? 바람같이 달리면 아무도 붙잡지도, 말을 걸지도 못할 테니까. 드디어 대중교통 패스 ‘뮤니(Muni)’ 앱을 깔았다. 하루 5달러면 주요 중심지로 자유롭게 몇 번이고 이동할 수 있다. 진작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면 좋았을 것을! 버스 내부는 생각보다 깔끔하고 정거장의 노선도와 스케줄은 알아보기 쉬웠다.     


샌프란시스코에는 대중교통 이용자에게 할인 혜택이 있는 박물관이 있었다. 바로 드 영 뮤지엄(De Young Museum). 샌프란시스코 하면 손에 꼽는 대표적인 박물관 중 하나다. 박물관의 입장료 정책을 보면 어떤 철학을 가진 박물관인지 엿볼 수 있다. 드 영 뮤지엄은 대중교통 이용을 장려하고 사회적 역할에 관심을 가진 훌륭한 기관임에 틀림없었다.  

 

심지어 매주 토요일, 샌프란시스코 베이 거주자는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9개 카운티(앨러미다, 콘트라 코스타, 마린, 나파, 샌프란시스코, 샌마테오, 산타클라라, 솔라노, 소노마)가 거주한다는 ID만 제시한다면 말이다.

     

그날도 토요일이었다. 외국인 여행자인 나는 당연히 해당 사항이 없었다. 관람료는 성인 20달러. 혹시 ICOM 카드가 통하지 않는다면 대중교통 패스를 보여주고 2달러 할인을 받아볼 생각이었다. 골든 게이트 공원 버스 정류장에서 우르르 하차한 사람들을 따라 정문으로 입장했다. 모두 드 영 뮤지엄을 향했다. 이토록 생기와 활력이 넘치는 박물관이라니!      


2층에서 내려다본 드 영 뮤지엄의 중앙 홀. 케힌데 와일리(Kehinde Wiley)의 특별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안내소에서는 한글로 된 리플릿도 함께 받았다. 한글 리플릿을 제공하는 외국의 박물관은 언제나 최고!!


1층 안내소는 많은 인파로 붐볐다. ‘무료 관람하는 토요일(Free Saturday)’이라서 그런 걸까? 토요일의 입장료는 샌프란시스코의 저명한 후원가이자 사교계 명사인 디디 윌시(Dede Wilsey; 원래 이름은 Diane B. Wilsey)가 전액 부담한다. 그리고 프로그램은 코렛 재단(Koret Foundation)과 웰스 파고(Wells Fargo) 은행의 지원으로 운영된다.



# 공적인 박물관과 사적인 돈의 불편한 동거     


박물관은 관람객을 중심으로 대중의 문화 활동에 공헌하는 문화 기관이다. 이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있어 공립인지, 사립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국제박물관협의회(ICOM)가 정의한 박물관을 간략하게 말하자면, 인류의 문화를 수집하고, 연구하고, 전시하고, 교육하는, 그러한 공공성을 지닌 비영리 기관이다.

     

여기서 요점은 ‘비영리’ 기관이라는 것이다. 

고고하고 품격 있는 겉모습과는 달리 박물관의 속사정은 돈 문제 때문에 골머리가 아플 수 있다. 소장품을 구입하고 연구하는 자산비용뿐만 아니라, 소장품을 위한 보험, 전기요금, 경비 비용 등 부수적인 비용에다가 인건비를 포함한 각종 운영 예산까지! 돈이 나갈 곳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물론 내부적으로 자금을 조달하려는 여러 가지 방법(입장료, 멤버십 프로그램 관리, 뮤지엄샵, 식당, 저작권 또는 출판 수입 등)이 있긴 하다. 겨우 일부만 충당할 뿐이지만.  

   

많은 박물관은 정부의 보조금으로 운영된다. 그러나 이것도 한계가 있다. 정부의 정책과 기조에 따라 지원 금액이 널뛰기를 할 수 있고, 모든 비용을 의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특히 미국에서 예술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유럽이나 아시아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그래서 자선단체와 개인 기부자의 후원은 박물관을 운영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그리고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 드 영 뮤지엄은 마이클 헨리 드 영(M. H. de Young)이라는 신문 재벌의 강력한 후원으로 만들어졌다.  


그의 이름을 딴 박물관 앞에 선 드 영의 모습이다.
1894년 당시 이집트 양식으로 지었던 미술관의 내부 모습이다.


처음에 박물관은 ‘1894년 캘리포니아 한겨울 국제박람회’의 개최 결과로 이집트 양식으로 건설한 미술관 건물을 활용하기로 하면서 시작했다. 그런데 이 건물은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인해 훼손되고 말았다. 그때, 드 영은 건축가 루이스 크리스티안 멀가트에게 스페인 플라테레스코 양식으로 건물을 짓도록 했다. 건물은 1906년 완공되었고, 박물관의 공식 명칭도 ‘M. H. 드 영 박물관’이 되었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를 뒤흔든 또 한 번의 지진이 발생했다. 

1989년 로마 프리에타 지진이었다. 언뜻 약간의 피해만 입은 것처럼 보였지만, 1993년 지진 평가를 받고 건물의 위험도가 굉장히 높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임시로 외부에 강철 버팀대를 설치하고 박물관을 계속 운영하고 있었지만, 그걸로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당시 이사장이었던 디디 윌시는 새로운 박물관 건물을 짓기로 결정했다.   

  

다만, 신축을 위한 재원은 공적 자금을 활용하지 않고, 모금 활동을 통해 마련하기로 했다. 디디 윌시는 후원자를 모집해 돈을 모으려고 노력했다. 동시에 새로운 건축 프로젝트를 맡을 우수한 건축가를 선정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다. 25군데의 건축회사에서 제안서를 제출했고, 그중에서도 스위스의 젊은 건축가였던 헤르조그와 드뫼롱(Herzog & de Meuron)이 발탁되었다. 그들은 박물관의 수집품을 조명하고 새로운 맥락에서 재해석함으로써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오늘날 만나는 드 영 뮤지엄의 건축은 헤르조그와 드뫼롱의 작품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뮤지엄 건물의옥상. 공원으로 펼쳐지는 철길을 닮았다.


헤르조그와 드뫼롱은 동그랗게 구멍이 송송 뚫린 동판을 외벽으로 삼고, 멕시코 피라미드를 거꾸로 뒤집은 듯한 독특한 탑을 만들었다. 그리고 2005년 개관하였다.     


드 영 뮤지엄은 2005년 새롭게 개장하면서 300점 이상의 뉴 기니 예술품과 아프리카 작품을 구매했다.

와티스가족재단(Wattis Family Foundation)과 필리스 C. 와티스의 주요 가입 기금(Phyllis C. Wattis Fund for Major Accessions)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지금도 드 영 뮤지엄의 컬렉션 중 뉴 기니 예술품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2007년에는 토머스 G. 파울러(Thomas G. Fowler)의 수집품 중에서 이누이트 예술품을 기증받았다. 이처럼 드 영 뮤지엄은 외부의 모금과 다양한 재단의 지원으로 잘 쌓아 올린 탑처럼 견고하게 유지되어 왔다.      


드 영 뮤지엄이 자랑하는 뉴 기니 컬렉션 중 일부 전시.
어머니 상(Maternity Figure), 12-15 세기 말리(Mali) 젠네 사람들의 작품이다.


그러나 외부로부터의 후원, 모금, 기증은 공공성을 추구하는 박물관을 사적인 영역으로 변질시키기도 한다. 미술사학자 앨런 왈라치는 미국의 미술사에서 1900년에서 1960년 사이를 ‘도둑 남작(robber baron)’ 단계라고 분류했다. 도둑 남작이란 노동 착취나 사기 등 부정한 방법을 통해 산업 자본을 축적한 신흥 갑부들을 말한다. 비록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사회적인 성공을 이루었지만, 도둑 남작들은 산업 인프라와 교육기관에 부의 재분배를 일부 실행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J.P. 모건과 앤드류 카네기 같은 인물들처럼 말이다.     


그들은 박물관 재정을 지원하고, 이사직에 오르고, 박물관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도둑 남작들이 어떻게 박물관을 사유화하고, 예술의 흐름을 뒤흔들었는지는 여기서 구구절절 설명하기는 어렵다. 다만 매주 토요일, 샌프란시스코 베이 거주자들의 입장료를 책임지는 디디 윌시는 기존의 큐레이터를 해고하고, 자신의 아들이 소장한 사진 전시회를 열도록 강요해 문제가 된 적이 있다. 강력한 후원자는 대중에게 혜택을 주는 한편, 공공성을 해치기도 하니 아이러니한 노릇이다.



# 드 영 뮤지엄의 카페에 앉았다.     


관람객들은 대부분 ‘멤버(Member; General Admission)’ 스티커를 가슴에 붙이고 다녔다. 내가 ICOM 카드를 내밀고 받은 스티커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실제 뮤지엄 멤버십에 가입한 멤버가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베이에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무료입장 티켓일 것이다.  

   

공짜로 입장하는 데 성공하면서 나의 지갑은 더욱 활짝 열렸다. 

본격적으로 전시를 관람하기 전에 배를 먼저 채울 요량으로 뮤지엄 카페부터 찾았다. 여느 레스토랑처럼 메뉴가 많았지만, 주말 브런치 메뉴로는 프렌치토스트, 프리타타 등 네 가지가 있었다. 나는 폭찹과 채소볶음, 레모네이드, 프렌치토스트를 주문하고 나서 테이블에 앉았다. 그제야 나를 둘러싼 박물관의 경관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뮤지엄 카페에선 가성비 좋은 브런치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박물관의 독특한 외관을 따라 야자수가 심어져 있다.
제임스 터렐의 작품은 어떻게 찍어야 할지 감이 안 온다. 막 찍어 보았다.
거대한 옷 핀 등장! 찔리지 않게 조심.


커다란 야자수, 하얀 관람차, 기분 좋게 불어오는 가을바람, 잔디밭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게다가 뮤지엄 카페는 숨어 있는 조각품과 설치예술작품을 찾아보는 비밀스러운 야외전시장이기도 했다. 너무나 푸르게 우거진 수풀 사이에 팝 아트 예술가 클래스 올덴버그의 거대한 옷핀이 불쑥 나타나고, 제임스 터렐의 하늘공간(skyspace)은 아무도 없이 조용해서 대나무가 흔들리며 부딪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원주에 있는 뮤지엄산의 제임스 터렐관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달콤한 고요함이었다.    

 

내가 만약 샌프란시스코 베이 거주자라면, 토요일에 몇 번이고 찾을 브런치 카페였다. 무엇보다도 드 영 뮤지엄은 골든 게이트 공원 안에 있어서 매력적이다. 뮤지엄의 맞은편에는 흡사 놀이공원 앞에서 보듯 잔뜩 흥분한 어린이들이 줄을 서서 들어가는 캘리포니아 과학 아카데미가 있고, 그 사이에는 분수를 둘러싼 타원형의 공간에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서, 돗자리를 깔고서 소풍을 즐겼다. 영락없이 한가롭고 평화로운 주말 낮을 보내는 샌프란시스코 사람들이다. 우리나라에 이런 공간이 있던가? 동행인에게 물었지만, 바로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하마터면 드 영 뮤지엄의 이런 모습을 보지 못할 뻔하기도 했다. 1989년 로마 프리에타 지진으로 인해 건물을 철거할 때, 이참에 박물관 부지를 다운타운으로 옮기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골든 게이트 공원에 있게 한 것은 샌프란시스코의 시민들이었다. 여론 조사에서 80% 이상의 시민들은 드 영 뮤지엄은 골든 게이트 공원에 계속 있기를 희망했다.  

   

다운타운에서 단 20분, 버스를 타고 이동했을 뿐인데. 샌프란시스코의 무섭고 불편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다시 서울로 돌아갈 한국인 관광객에게 잊지 못할 샌프란시스코의 또 다른 모습을 선사했다.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샌프란시스코 사람들의 한적한 주말 풍경을 말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드 영 뮤지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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