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글할매의 행복한 역이민 생활
어려서부터 난 유난히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엄마가 편찮으실 때는 그 어린 나이에도 부엌에 들어가서 엄마 대신 밥하고 간단한 반찬들을 만들곤 했었다. 아마도 그때부터 주방에서 사는 나의 인생이 결정된 것 같다.
4대 독자 집안으로 시집오신 엄마가 내리 셋 째 딸을 낳으시고는 너무도 보기 싫다고 내치는 바람에 그때부터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내가 사랑 못 받고 자란다는 것을 너무도 일찍 깨닫고는 엄마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 어린 나이에도 엄마가 아프면 아무도 시키지 않는데도 그저 엄마한테 칭찬받고 싶어서 스스로 부엌에 들어간 것이다. 거의 평생을 나의 좋은 습관으로 자리 잡고 있는 새벽 기상이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아마 그때부터였었나 보다.
꼭두 새벽부터 일어나서 밥하고 반찬 만들고 언니들 도시락 싸고 내 도시락도 준비해서 그러고는 학교는 남들보다 먼저 도착하곤 했었는데 그 과정이 지금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하고 있는 미라클 모닝이었나 보다.
괜히 일찍 철 들을 필요가 없었다. 사서 고생만 한 것이다. 그 어린 나이에 언니들 도시락을 싸줬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사서 고생만 한 것이다. 언니 둘하고 막내 여동생은 어디를 가면 공주마마 대접을 받는데 어려서부터 일 잘한다고 소문난 나는 친척 집에 놀러 가도 다른 사람들은 아랫목에 앉혀놓고 나는 영락없이 부엌으로 불려갔다.
그때부터 또 다른 나의 무수리 인생이 시작됐었나 보다. 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나 스스로 무수리라고 칭하면서 살아왔는지 그 이유가 이제야 온전히 알겠다. 바로 어릴 때의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 같다.
성격이 팔자를 만든다는 말이 있다. 절대로 스스로를 무수리라고 하면서 모든 것을 양보하고 눈치 보면서 살지 말았어야 했다. 남들이 착하다고 하는 소리에 그저 싱글벙글 웃지 말았어야 했다.
착하다고 하던 사람들한테 결국은 나는 호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데 너무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래도 열심히 인생 공부를 해 온 덕분에 그 모든 힘들었던 시간들도 다 나한테는 하나의 소중한 인생 공부였었다고 느끼면서 살고 있다.
우리 때는 요리라는 말을 별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요리라는 것은 아주 근사한 요리집이라는 곳에 가서 먹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저 하루 먹을 세끼 음식 장만하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에 요즘처럼 집에서도 요란한 요리를 만들 일은 없었기에 어려서도 음식을 만들 수는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어려서부터 그렇게 음식을 만들어서인지 이상하게도 일하는 것에 겁을 안 낸다. 자그마한 체구에 유난히 손은 또 작다. 하지만 우리 때는 손이 작으면 바지런하다고 하면서 칭찬을 하곤 했었다. 손은 그렇게 작으면서 음식만 만들었다 하면 그 손이 크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워낙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하고 나눠 먹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한 번 만들었다 하면 무슨 잔칫상 벌려놓듯이 하곤 했다.
아직도 여전히 손이 커서 우리 집에 놀러 오는 사람은 배불리 먹여 보내려고 최선을 다한다. 우리 집에 놀러 오는 사람들마다 하는 말이 있다. “배불러 죽겠다"라고 한다. 이 말을 듣는 것이 참 행복하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서 이런 것도 조심해야 하는 생각도 든다. 하도 다이어트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이렇게 배불리 먹이다가 나중에 뒤통수 한 대 맞는 것 아닌가라는 걱정도 든다. 세상이 이상해져 가는 것인지, 내가 이상해져 가는 것인지 도무지 헷갈려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사람의 진심이 점점 더 사라져가는 것이 너무도 쓸쓸하다.
그래서인가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주고 좋아하는 것들 잔뜩 냉장고에 채워놓고 이제나 오려나 저 제나 오려나 목을 빼고 기다려도 다들 자기 인생 바쁘다는 이유로 영 찾아오지를 않는다.
그래서 결심했다. 그동안 너무 꽉 차서 고생만 시키던 내 냉장고도 조금 쉬게 해주고 싶었다. 냉장고도 다이어트가 필요할 것 같다. 냉장고도 꽉 차있을 때보다는 70% 정도 차 있을 때가 훨씬 더 성능도 좋아진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대대적으로 냉장고 청소를 시작했다. 하나하나 꺼내면서 살펴보니 참 가관이다. 이걸 언제 먹는다고 사다 놨을까 하는 것들이 태반이다.
우리 집에 가끔 놀러 오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위주로 냉장고가 차여져 있었다. 맥주, 와인, 막걸리, 심지어는 하이볼 재료까지 있다. 거기에다 각각의 주류에 어울리는 안주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비싼 올리브랑 고급 치즈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누군가를 위한 안주용이다.
참 많이도 사다 놓았다. 이렇게 아직도 그대로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동안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구나라는 쓸쓸한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칠십을 하나 넘긴 나이가 되면서 참 많이도 내려놓았다고 생각을 했는데 아직도 이렇게 쓸쓸한 감정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내려놓아야 할 것이 더 많은가 보다. 눈 높이도 많이 내리면서 바라지도 않으려고 하는데 그래도 아직도 부족한가 보다. 어디까지 더 내려놓아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내리고 내리다가 코가 땅바닥에 닿을까 봐 또 걱정이다. 오죽하면 사람 기피증이 있는 우리 집 양반이 한 달에 한 번도 전화 안하는 사람은 연락처를 삭제하라는 말에 서로 쳐다보고 한참을 웃었다. 이 양반도 외로웠나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추려서 삭제하다보면 정말 너무 슬프게도 남아있을 사람이 거의 없다. 이럴 때 미국에 두고온 정말 소중했던 사람들이 너무도 그리워진다.
그래도 홀로서기 연습을 많이 해서인지 확실히 그전보다는 덜 외롭다. 글쓰기라는 친구가 생겨서인 것 같다. 그래서 또 생각한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생긴 대로 살자는 생각이 든다. 오면 오는 것이고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기로 했다. 오지 않는 사람 기다리느라고 괜히 목 빼지 말자고 다짐을 해본다. 목이 길어 슬픈 사슴이여가 아니라 늙어 목만 긴 것도 그리 아름다워보일 것 같지가 않다.
하지만 냉장고만큼은 다이어트를 유지하게 해주고 싶다. 평생을 다이어트에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는 냉장고 주인의 소원을 위해서라도 냉장고만큼은 다이어트에 성공하게 해주자.
나는 장 보러 다닐 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신선한 재료들 구경하는 것도 너무 좋고, 맛있는 것 골라잡는 재미도 너무 좋다. 예쁜 맥주 병이 있으면 무조건 하나씩 장바구니에 담을 때 너무 행복하다.
하지만 냉장고 다이어트를 위해서는 이런 장바구니 즐거움도 현명하게 고쳐나가야 할 것 같다.
혹시 모르니까, 언제 갑자기 올지 모르니까, 이런 생각으로 냉장고에 재워놓는 일은 더 이상 하지 말자. 맛있는 것 있을 때 찾아오는 사람은 운 좋게 맛있게 먹고 갈 것이고 아무것도 없을 때 오는 사람은 그야말로 국물도 없다는 마음으로 살면 된다.
이제는 남을 위한 냉장고가 아니라 나랑 우리 삼식이 아저씨 건강에 좋은 것들로만 채워나가자. 그전에는 양이 우선이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우리 노부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양보다는 질을 택하자.
그만큼 고생하고 살았으면 됐다. 이제는 우리도 좀 누리고 살자. 그만한 자격은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영원히 변하려고 하지 않는 우리 집 양반의 고정관념을 어떻게 깨트려야 하는 가가 최대 난관이다.
아직도 세상은 살만하고 여기저기 즐겁게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너무도 많은데 어쩌자고 이렇게 집에만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집 양반의 뇌를 리셋해야겠다.
황창연 신부님 말씀대로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행복한 노년을 즐길 수가 있다는 말씀을 뇌에 새겨줘야겠다.
그러고 보니 뇌도 다이어트가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