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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업글할매 Feb 11. 2024

할매도 번아웃?

업글할매의 행복한 역이민 생활

할매한테도 번아웃이라는 것이 찾아오는지 요새 영 힘이 없다. 너무 열정이 넘쳐서 오히려 걱정거리였던 것이 요즘 들어 갑자기 맥이 빠진다. 소위 말하는 “번아웃”이라는 것이 새삼스럽게 칠십 한 살 할매에게도 찾아온 것 같다.


웬 번아웃?


웃긴다. 할매가 무슨 번아웃. 지나가는 강아지가 쳐다보고 웃겠다.


번아웃에 대한 이미지를 찾아보다보니 전부 젊은 사람들 이미지 밖에 없다. 할머니의 그림을 찾아봤더니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러니 할매가 번아웃이라니, 웃길 수 밖에.




작년 12월에 그토록 원하던 브런치 작가라는 타이틀을 땄다. 남들이 나를 작가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의 황홀했던 그 순간을 아직도 간직하면서 이제부터는 죽을 때까지 그저 글만 쓰면서 살고 싶다고 생각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라도 너무도 다르다. 글 쓰는 환경이 되어 있지를 않은 것이다.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의 로망은 근사하고 아늑한 서재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갓 내린 따뜻하고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면서 글을 쓰는 것이란다.


여기까지는 나 역시 글쓰기에 완벽한 나만의 서재를 갖고 있으니까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일 년 365일 젖은 낙엽처럼 붙어 다니는 우리 삼식아저씨 덕분에 나 만의 자유로운 시간을 확보한다는 것이 너무도 어렵다.


여러모로 연구대상인 우리 집 양반의 고약한 성미를 거스르면서 살아남을 재주가 나한테는 없다. 그저 모든 것을 남편한테 맞추면서 살고 있다. 그런 와중에 간신히 생기는 그 소중한 짜뚜리 시간에 나를 위한 나만의 자유의 시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글을 써야 하는데 하루 세끼 밥 차리고, 청소하고, 틈틈이 신랑 비위 맞추느라고 그리 즐기지도 않는 트로트 방송 같이 보고 나면, 그다음에는 피곤해서 지쳐버린다.


그래도 책도 읽어야 하고, 글도 써야 하고, 잠깐 손을 놓아버리면 완전히 잊어버리는 디지털 세계에도 눈인사를 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힘에 부쳤니보다.




난, 글을 써야 하는 브런치 작가인데 어쩌자고 우리 집 양반은 이다지도 나를 이해를 못 해주는지 야속하고 답답하다. 기껏 한다는 소리가 글 쓰는 마누라 때문에 자기는 우울증이 왔다고 동네방네 소문내기가 바쁘다.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마누라가 글 쓰느라고 자기를 투명인간 취급한단다.


남자들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점점 더 어린아이처럼 변한다더니, 어쩜 이리도 딱 들어맞는 말들을 했을까. 한 번 삐졌다 하면 그 뒤끝이 장난이 아니라서 평생을 맞추고 살았다. 그 결과가 영혼의 자유를 빼앗긴 노후가 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고 나면 정신없이 바뀌는 이 세상에 적응하고자 나름 죽기 살기로 틈새를 이용해서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면서 참 열심히 살았다.


블로그도 해보고, 브런치에 글도 올리면서 드디어 행복한 내 생활을 찾았다고 기쁨에 들떠있기도 했다. 그러다가 번아웃이 온 것 같다.


주변에서 아무 생각 없이 툭 던지는 말 한마디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니고, 누가 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죽기 살기로 하냐는 소리에  알게 모르게 많이 위축되나 보다.


글쓰기라는 것이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 일기가 아니고 블로그나 브런치에 올리다 보니, 아무리 “좋아요”나 “구독”에 무관심하려고 해도 이상하게 마음과는 다르게 신경이 써진다.


어쩌다 “좋아요”나 구독이 올라오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글 쓰는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그런 느낌이 너무도 좋다. 그러다가 너무 조용하면 또 기분이 가라앉는다. 내 글이 형편이 없나, 그래서 안 보나 …이런 자신감 없는 생각이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구독을 했던 사람이 소리 소문없이 자취를 감추면, 이건 또 왜 이리 가슴이 시리고 아프던지 정말 여러가지로 못 말린다.


“50부터는 인생관을 바꿔야 산다."라는 책에서 사이토 다카시 작가님 이 말씀 하시던 것이 생각이 난다. . 오십이 넘으면 SNS 같은 곳에서 “좋아요”는 필요 없는 나이라는 사실을 가슴속에 새겨두고 살라고 따끔하게 침을 놓으신다.


꼭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 같아서 괜히 뜨끔해지면서 살짝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오십이 넘으면 하지 말라는 것을 어쩌자고 칠십이 넘은 사람이 아직도 연연하고 있는지 한심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 또 구차한 변명거리를 만들어 본다. 난 이제 막 시작한 새내기라서 그런다고.


나름 열심히 정성을 다해서 올리는 글이 그래도 어느 정도 사람들의 반응이 있어야 활력이 생기는 것 같다. 아무리 그런 것 하고는 상관없다고 겉으로는 큰 소리 빵빵 치면서도 약하디 약한 사람의 마음인지라 또 나약해진다.


“대답 없는 허공의 메아리”라는 말이 생각이 난다.


갑자기 외로워진다.

외로워지기 싫어서 시작한 것이 왜 나를 다시 외롭게 하는 것인지.


이래서 번아웃이라는 것이 찾아왔나 보다.


거의 평생을 엄청난 에너지로 나를 지탱해 주던 것들이 갑자기 스멀스멀 빠져나간 것 같다.


도로아미타불이다.



정신과에서는 번아웃을 “소진증후군”이라고 한단다.

난 이 말이 훨씬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다.


지칠 대로 지칠 때 나타난다는 “소진증후군”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말이다.


그냥 지친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늘 그 자리인 것 같아서 힘이 빠지나 보다.


재미있게도 “번아웃이”나 “소진증후군”같은 것은 열심히 한 사람한테만 찾아온다는 말에 따뜻한 위로를 느낀다.


열심히는 살아온 것이다.


그러면 됐다


그래도 나를 믿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늘 그랬던 것처럼 아마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새롭게 나를 일으킬 뭔가를 찾아서 또 다른 에너지로 나를 일으켜보자.


“번아웃“이라던가 ”우울증 “

이런 것 그전에도 해봤는데, 영 몹쓸 것들이다.


결국 나만 잡아먹더라.


하루라도 빨리 털고 일어나는 것이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하는 일이라는 것을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일어나라!


이제 칠십에서 한 살 더 먹었을 뿐인데 “번아웃”이라는 고약한 친구한테 지고 싶지 않다.

나이 때문일 것이라는 소리도 듣기 싫다.


요즘 나이로 환산하면 이제 겨우 육십이다.

아직도 팔팔할 나이다.


우리 나이로  육십이 될 때까지의 나는, 토끼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참 열심히도 뛰어다녔다.  지금 칠십하나라는 나이가 아닌 요즘 나이인 육십으로 살자.


그때의 열정을 다시 불러와서 하나도 쓰잘 데 없는 번아웃이나 우울증을 싹 날려버리자.


기분 전환도 할 겸 오늘은 무조건 내가 좋아하는 곽지해변으로 걸으러 나가야겠다. 삼식이 아저씨가 째려보거나 말거나.


나가면서 한 마디 속으로 해줘야겠다.


“이래 봬도 난 작가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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